박은영 시인 썸네일형 리스트형 쑥 / 박은영 쑥 / 박은영 넓은 들판이었다 우물가 동백꽃도 다 떨어진 조용한 오후였다 어머니는 햇빛을 등진 채 어린 쑥의 시린 발꿈치를 어루만졌다 살아온 세월만큼 더딘 걸음으로 옮겨가는 당신의 갈라진 손끝은 푸른 물이 배고 대소쿠리는 이른 봄으로 묵직했다 산 벚나무 환하게 눈을 뜨는 봄 먼 들판을 보고 있으면 입안에 쓴물이 고였다 쓰디쓴 봄의 흔적을 지우고 양지 바른 자리에 웅크린 어머니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된장뚝배기가 끓고 찰진 떡 치대는 소리가 났다 엄마 엄마 부르면 꽃대 같은 고개를 들어 낭창거리고 다시금 몸을 숙이던 유년의 어느 저편 까막눈 당신은 저물도록 들판을 읽어내려갔다 추운 겨울을 견뎌낸 푸른 쑥이 내 눈물콧물에 버무려지고 있었다 개구리 우는 논두렁을 지나 산 벚꽃 흩날리는 들판을 내달리다 넘어진 어.. 더보기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