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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시인

조화 / 이명윤 조화 / 이명윤 이화공원 묘지에 도착하니 기억은 비로소 선명한 색채를 띤다 고왔던 당신, 묘비 옆 화병에 오색 이미지로 피어 있다 계절은 죽음 앞에서 얼마나 공손한지 작년 가을에 뿌린 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울며불며한 날들은 어느새 잎이 지고 죽음만이 우두커니 피어 있는 시간, 우리는 일렬로 서서 조화를 새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술을 따르고 절을 하는 도중에 어린 조카가 한쪽으로 치워둔 꽃을 만지작거린다 죽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한 거다 세월을 뒤집어썼지만 여전히 부릅뜬 웃음을 본다 우리는 모처럼 만났지만 습관처럼 갈 길이 바빴다 서로의 표정에 대해 몇 마디 안부를 던지고 떠나는 길 도로 건너편 허리 굽은 노파가 죽음 한 송이를 오천 원에 팔고 있다 차창 너머로 마주친 마른 과메기의 눈빛 삶이 죽.. 더보기
수의 / 이명윤 수의 / 이명윤 이렇게 함께 누워 있으니 비로소 운명이란 말이 완전해집니다 ​ 당신을 향한 모든 절망의 말들이 내게로 와 흰 눈처럼 쌓이는군요 나는 철없는 신부처럼 아름다운 죽음을 얻어 살아있습니다 가장 적극적인 자세의 천장이 지켜보는 봄날의 오후, 문밖에는 꽃과 새들과 바람이 서성이다 돌아가겠지요 전신 거울을 볼 수 있을까요 공원 호숫길도 궁금한 날 멀뚱멀뚱 나는 두 눈을 뜨고 거룩한 당신이었다가 우스꽝스러운 나입니다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나는 나로부터 멀리멀리 걸어가야 합니다 자꾸만 삶을 향해 흔들리는 나를 잊으려 당신을 따뜻하게 안습니다 그러니까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죽음이 슬픔을 우아하게 맞이하도록, 태도는 끝까지 엄숙하게, ​ ―계간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2007년 《시안》으로 등.. 더보기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 이 명윤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 이 명윤 ​ ​ ​내 마음의 강가에 펄펄, ​쓸쓸한 눈이 내린다는 말이다 ​유년의 강물냄새에 흠뻑 젖고 싶다는 말이다 ​곱게 뻗은 국수도 아니고 ​구성진 웨이브의 라면도 아닌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나 오늘, 원초적이고 싶다는 말이다 ​너덜너덜해지고 싶다는 뜻이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도시의 메뉴들 ​오늘만은 입맛의 진화를 멈추고 ​강가에 서고 싶다는 말이다 ​어디선가 날아와 ​귓가를 스치고 ​내 유년의 처마 끝에 다소곳이 앉는 말 ​엉겁결에 튀어나온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뇌리 속에 잊혀져가는 어머니의 손맛을 내 몸이 스스로 기억해 낸 말이다 나 오늘, 속살까지 뜨거워지고 싶다는 뜻이다 ​오늘은 그냥, 수제비 어때, ​입맛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당신, 오늘 외롭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