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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시인

남겨두고 싶은 순간 / 박성우 남겨두고 싶은 순간 / 박성우 시외버스 시간표가 붙어있는 낡은 슈퍼마켓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오래된 살구나무를 두고 있는 작고 예쁜 우체국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유난 떨며 내세울 만한 게 아니어서 유별나게 더 좋은 소소한 풍경, 슈퍼마켓과 우체국을 끼고 있는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아 저기 초승달 옆에 개밥바라기! 집에 거의 다 닿았을 때쯤에야 초저녁 버스정류장에 쇼핑백을 두고 왔다는 걸 알았다 돌아가 볼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나, 나는 곧 체념했다 우연히 통화가 된 형에게 혹시 모르니, 그 정류장에 좀 들러 달라 부탁한 건, 다음날 오후였다 놀랍게도 형은 쇼핑백을 들고 왔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있었다는 쇼핑백, 쇼핑백에 들어있던 물건도 그대로였다 오래 남겨두고 싶은 순간이었다 -계간.. 더보기
쌀나방 / 박성우 쌀나방 / 박성우 그냥 쌀이 아니라고 했다 아내는 어디선가 십 킬로짜리와 이십 킬로짜리 쌀을 두 포대나 배달시켰다 일체 약도 안 하고 키워서 몸에도 좋고 밥맛도 좋을 거라는 아내의 말은 맞았다 수수와 조를 섞어 지은 밥은 여간 맛이 좋은 게 아니어서 쌀 한 포대를 금방 비웠다 한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한동안 사라졌던 나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두 번째로 개봉해 먹고 있던 쌀을 휘저으며 살펴보니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쌀나방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무농약 쌀이 맞긴 맞나보네, 내 검지를 타고 오른 쌀나방은 식탁 쪽으로 씩씩하게 날아오르며 아무런 해가 없는 좋은 쌀이라는 걸 몸소 증명해 보여주기까지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문득 나는 나방을 먹고 사는 작은 새 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