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나방 / 박성우
그냥 쌀이 아니라고 했다
아내는 어디선가
십 킬로짜리와 이십 킬로짜리 쌀을
두 포대나 배달시켰다
일체 약도 안 하고 키워서
몸에도 좋고 밥맛도 좋을 거라는
아내의 말은 맞았다
수수와 조를 섞어 지은 밥은
여간 맛이 좋은 게 아니어서
쌀 한 포대를 금방 비웠다
한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한동안 사라졌던
나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두 번째로 개봉해 먹고 있던
쌀을 휘저으며 살펴보니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쌀나방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무농약 쌀이 맞긴 맞나보네,
내 검지를 타고 오른 쌀나방은
식탁 쪽으로 씩씩하게 날아오르며
아무런 해가 없는 좋은 쌀이라는 걸
몸소 증명해 보여주기까지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문득 나는 나방을 먹고 사는
작은 새 한 마리를 키우고만 싶어진다
ㅡ 계간《시에 》(2021, 여름호)
<시인의 약력>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
창작학과 졸업,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02년 시집 『거미 』 『가뜬한 잠』
『자두나무 정류장』 등
<by 이종원의 시 감상>
일단 시인의 시는 사실적이면서도 감미롭기까지
하다. 적어도 내게는 시인의 쌀이 내 밥이고, 거
기로부터 꺼내놓은 쌀나방 또한 지금 내 눈앞에
서 작은 날개를 휘적거리며 날고 있는 시처럼 느
껴진다. 대개는 쌀벌레를 죽음 쯤으로 치부하고
말 것인데 시인은 쌀이 주는 생명력에 기생 관계
일 수도 있음을 가시하면서 쌀과 쌀나방, 밥과
나의 관계를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닐까? 나방
을 먹고 사는 작은 새와 쌀을 먹고 사는 쌀나방,
어쩌면 먹이사슬일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자연
스런 삶의 조화를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으로 답이 궁금해진다.
'내가 읽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살 / 김기택 (0) | 2023.02.15 |
---|---|
복숭아뼈 / 최금진 (0) | 2023.02.14 |
예감 / 김사이 (0) | 2023.02.14 |
골목을 수배합니다 / 최정신 (0) | 2023.02.14 |
뿌리의 방식 / 박종인 (0) | 2023.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