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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詩

골목을 수배합니다 / 최정신

골목을 수배합니다 / 최정신

 

 

 

처음 걸음마를 떼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가르쳐 준 골목이었어요


밥 짓는 냄새가 그윽한 굴뚝이 구름을 복사하고
모퉁이마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내려다보던

전봇대가 온갖 바깥소식을 전하고
찹쌀떡, 메밀묵이 야경을 돌고
채송화, 분꽃, 과꽃, 코스모스가 계절을 데려다 주었어요


고무줄놀이로 근육을 키웠고
땅따먹기로 보폭을 키우기도 했어요

담 밑에 기대 서러움도 달랬고
첫사랑을 빙자해 입술도 훔쳐 갔어요


처마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된장찌개 냄새를 날리며
이마를 맞댄 창가에

구절양장 낭만이 깜박이던
백열등 따스한 불빛은 어디쯤 있을까요


주차금지 팻말에 서정을 빼앗긴 골목

어느 날 굴착기란 괴물이 들이닥쳐
골목이란 골목은 죄다 부수고 박살을 냈어요
골목에서 은혜를 입은 아이들이
자본주의 맹신자가 되어 골목을 배신했어요


시대가 집어삼킨 골목을 수배합니다

 

 

계간 시선 2019년 봄호

 

<시인의 약력>

 

  

 

경기도 파주 출생, 2004 문학세계로 등단

시집 구상나무에게 듣다동인시집 시와 그리움

 있는 마을』 『느티나무의 엽서를 받다 

 

 

<by 이종원의 시 감상>

 

골목을 찾아 대도시를 벗어나 본다. 겨우 겨우 물어서

고향 동네 어귀에서 마주친 골목도 옛 골목도 아니다.

시인이 내린 수배령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개발에 갈

아엎어진 골목의 냄새가 살아나는 것 같아 귀를 쫑긋

거린다. 간신히 찾아낸골목은 막 내린 드라마 세트장

처럼 발자국 소리와 떠드는 동심까지도 삼켜버렸다.

꽃밭과 야경의 모습은 담벼락에 붙어있고 입술을 훔

치던 낭만은 상업화에 꺼저 버렸기에 시인이 외치는

수배령이 마낭 그리워지기도 한다. 골목이 작아진 것

인가? 내가 커진 것이고 괴물이 된 것인가? 시인의

수배령에서 골목을 버리고 굴착기의 맹신주의자가

된 것은 아닌가? 된장찌개 냄새 같은 시의 울림으로

그리움과 동심을 달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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