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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장부

로드킬 로드킬 / 이 종원 고라니는 새벽을 가로 지르려다 멈추었다. 배송 없이 흔적만 남겨 놓고 먼 길 떠나는 사람, 도착하지 못한 울 음보다 덤ㄴ저 장의사는 빠르게 그의 이승을 수습한다. 초록에 물든 뒷동산, 오솔길의 오후를 복기하고자 해도 더는 깜박이지 않는 삶, 종이 한 장이 그이ㅢ 시간들을 대 신 옮겨 적는다 한때, 제 그늘에 꿈을 넗어놓기도 했다 사력을 다하여, 히라거나 멈추거나 충돌하거나, 확률에 서 떨어져 나온, 피로에 찌든 몸이 차선 위에 걸려 있다. 더보기
둥근 둥근 / 이 종원 쉿! 깊은 새벽이 게워놓은 해의 얼굴이었지요 직선이거나 네모라고 말하지 않을래요 걸음이 하루를 돌아와도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 출발 신호 늘 원에 갇힌 꿈을 꾸었어요 나는 점점 동쪽으로 기울기 시작해요 모서리가 왜 그리 많고 구부려야 할 직선이 넘치는지 뒤축은 닳고 더 밟혀야 하는지 날 선 톱니의 흔적도 지우지 못했어요 12개의 시간이 또 12개의 바늘을 붙잡아요 공들여 쌓은 탑도 사실은 밑어서부터인 것처럼 따지고 보면 둥근 시작처럼 다시 출발해야 할 시간 직선 위를 한 뼘씩 밟고 가 주세요 코너에서 꺽이기도 하는, 둥근 더보기
거미줄에 걸린 하루 거미줄에 걸린 하루 / 이 종원 정지신호에 걸린 50대 중반 L씨 그의 차는 시동이 꺼졌다 규정 속도 이상으로 달려오는 동안 바퀴는 과속으로 헐떡였고 엔진은 과열되었다 주행기록이 임계점을 넘었으므로 속도계는 다시 발기될 수 있을까 용도 폐기의 폐차 선고를 벗을 수 있을지 몇 걸음 더 걸어보려 하는데 쿨럭이던 기침소리마저 멈추었다 수혈이 필요한 엔진은 견인차에 실려 잠이 들었다 심장이 다시 돌아가는 확률에 걸어보는 생 우리들도 언젠가는 저 거미줄의 방어망에 사로잡힐 것이다 더보기
어떤 독백 어떤 독백 / 이 종원 대본 없는 오늘을 복기한다 3막 5장 연극이 끝나고 내 영혼이 잠시 멈춘 순간 공허 속 나에게 한 잔을 건넨다 하루에서 밀려난 배역이 해를 품으려는 골목 안쪽 초저녁부터 다시 시작된 홀로 공연에 관객을 없다 무언극인지, 모놀로그인지, 행위예술이 춤을 춘다 단골로 관람해온 1인 관객인 무관심한 표정의 주인 여자 클라이맥스 팡에서 문을 닫는다 또 다른 무대를 찾아 길을 나서는 밤 아직 배설을 끝내지 못한 연습생들은 남은 술병을 쓰러뜨리고 어릴 적 피터팬을 향해 잠을 청한다 더보기
동행 동행 / 이 종원 (사막을 예수와 걸어가던 청년이 모래폭풍을 만났다. 순간 예수의 발자국은 사라지고 모래폭풍을 걸어나왔 을 때 모래에 찍힌 발자국은 두 개 뿐이었다. 다시 예수 가 나타났을 때 청년은 불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힘 들 때 외면하는 예수는 제게 필요 없습니다. 어디 계셨 나요?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르르 업고 건너왔느니라" .......) 독백처럼 내 길이 흘러나온다 길은 휘어진 곳에서 다른 인연을 만나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므로 낙엽으로 지는 지금 가던 길을 계속 가도 좋아 호흡은 생명을 준 것 불안과 혼돈에 대하여 골똘하다가 바람소리 같은 은밀한 호명을 놓쳤다 괄호 안 숫자들이 암호를 풀고 나갔을 때 분명 나는 누군가에 업혀있거나 달라붙어 있다 길이거나 등 뒤 기척을 듣는 순간 귀먹.. 더보기
관계의 복원 관계의 복원 / 이 종원 복잡한 전철 통로에서 구걸을 만난다 선글라스 안 소경을 벗고 성한 눈을 내어놓으라는 듯 시선이 따갑다 평균대 위를 능력껏 걸어가라는 것 그러므로 너의 발은 네가 내 발은 내가 씼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 누구의 발을 씻어준 기억이 없으니 내 발도 남에게 부탁한 적이 없다 제자의 발을 씻긴 예수의 행적을 떠올린다 어찌 발뿐이겠는가 상처를 덮지 못하고 외면하는 이중적 눈금을 한 번쯤 씻어내야 한다 따듯한 물로 발을 씻어주는 것처럼 지폐 한 닢 바구니에 넣어주는 것으로 독선을 벗겨낸다 더보기
선인장 선인장 / 이 종원 외딴 섬 꽃씨가 되었다 해서 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유배지에 떨어져 외톨이가 되었다 해도 손가락질하지 마세요 목마르다 했을 때 건네주는 잔 없었고 외로움에 지쳤을 때 안아주지 않았습니다 나의 손은 멀리 있는 샘을 향해 길어졌고 몸은 가늘고 야위어 갔습니다 고함을 쳐도 귀 기울여주는 이 없습니다 비탄을 뱉어냈던 목소리에 가시가 돋습니다 사무친 갈증을 모른 체 하였기에 묻습니다 나를 끌어안을 수 있습니까 가시가 당신의눈을 찌를지도 모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막을 지나는 낙타 등에 올라 한 송이 꽃을 피우는 꿈을 꾸고 싶습니다 더보기
서울 바리새인 서울 바리새인 / 이 종원 소나무 싹을 자른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차용되는 순간이다 그는 선천성 지적 장애였고 판단 능력이 떨어졌다 붙잡거나 말려줄 성인들 또한 곁에 없었으므로 정사 참작이거나 동정의 여지마저 구할 수 없다 어린 새싹들이 잎으르 이루고 벌레들이 물러가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구형(求刑)을 바라보며 침묵하는 다수 판결의 결과가 굳어진다 새로운 판례에 기댄 것은 아니지만 재선충이 휩쓸고 간 자리에 바람만 가득하다 푸르름 사라진 솔밭 출입금지 표지 안으로 폐허가 뒹굴고 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