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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신 시인

섬진강 / 최정신 섬진강 / 최정신 삼월, 게으른 눈발이 뒷걸음질 멈짓 진주 지나 하동포구 평사리 사십리 한 물목 첫 연은 매화라 쓰고 둘 연은 산수라 쓰고 삼 연은 대숲이라 쓰는데 여백을 동백이 채운다 윤슬이 받아 적는 꽃타래 헝클어진 시를 언제 다 읽고 가라고 봄빛 하양 긴 날을 그리 읊는가 자꾸만 쓰지 마라 그토록 시울 깊은 절경의 시를, 천근 카르마는 어디쯤 부려야 하나 천릿길 더듬어 물 주렴 사연 따위 너에겐 소용치 않은 줄 알았더니 그짝 설움이 더 깊다니 수양버들 잇바디가 물색을 닮았음은 저도 강 따라 흐르고 싶나니 어쩌랴 흐르기는 너나 나나 한결, 화개장터 목로에 벚굴 한 점, 막걸리 한 모금, 너는 젖고 나는 취한다 구례, 소(沼) 깊은 계곡 거슬러 화엄에 들면 백매도 흑매도 한 오백 년 늙는다니 기리운 마.. 더보기
골목을 수배합니다 / 최정신 골목을 수배합니다 / 최정신 ​처음 걸음마를 떼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가르쳐 준 골목이었어요 밥 짓는 냄새가 그윽한 굴뚝이 구름을 복사하고 모퉁이마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내려다보던 전봇대가 온갖 바깥소식을 전하고 찹쌀떡, 메밀묵이 야경을 돌고 채송화, 분꽃, 과꽃, 코스모스가 계절을 데려다 주었어요 고무줄놀이로 근육을 키웠고 땅따먹기로 보폭을 키우기도 했어요 담 밑에 기대 서러움도 달랬고 첫사랑을 빙자해 입술도 훔쳐 갔어요 처마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된장찌개 냄새를 날리며 이마를 맞댄 창가에 구절양장 낭만이 깜박이던 백열등 따스한 불빛은 어디쯤 있을까요 주차금지 팻말에 서정을 빼앗긴 골목 어느 날 굴착기란 괴물이 들이닥쳐 골목이란 골목은 죄다 부수고 박살을 냈어요 골목에서 은혜를 입은 아이들이 자본주의 .. 더보기
젓가락 / 최정신 젓가락 / 최정신 너와 내가 마음이 상해 토라졌을 때도 직립의 막대기로 하나였지 우리가 둘이 하나였기에 핏속에 녹아드는 마음을 알았고 혼자서는 아물지 않던 상처도 만조가 쓸고 간 뻘밭처럼 치유할 수 있었지 우리가 되었다는 건 온몸에 물관을 칭칭 감고 숨과 숨을 기대 맑은 물 받아먹고 살던 어느 숲 솔밭 산에서 서로에게 업이 있었을 테지 또 한 생, 연이 닿아 외로움을 기대며 동행할 수 있다는 건 다행한 축복이지 철없던 푸름은 가고 싸늘해진 등을 기대 함께할 숙주가 되었지만 어쩌면 우리, 살아서 함께한 날보단 더 긴 날을 함께할지 모르지 않냐고 경기도 파주 출생, 신인상 수상, 동인 시집 『구상나무에게 듣다』, 동인시집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느티나무의 엽서를 받다』, 『동감』등 오랜만에 열어본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