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두고 싶은 순간 / 박성우
시외버스 시간표가 붙어있는
낡은 슈퍼마켓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오래된 살구나무를 두고 있는
작고 예쁜 우체국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유난 떨며 내세울 만한 게 아니어서
유별나게 더 좋은 소소한 풍경,
슈퍼마켓과 우체국을 끼고 있는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아 저기 초승달 옆에 개밥바라기!
집에 거의 다 닿았을 때쯤에야
초저녁 버스정류장에
쇼핑백을 두고 왔다는 걸 알았다
돌아가 볼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나, 나는 곧 체념했다
우연히 통화가 된 형에게
혹시 모르니, 그 정류장에 좀
들러 달라 부탁한 건, 다음날 오후였다
놀랍게도 형은 쇼핑백을 들고 왔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있었다는 쇼핑백,
쇼핑백에 들어있던 물건도 그대로였다
오래 남겨두고 싶은 순간이었다
-계간 《시인시대》 2019년 봄호
<시인의 약력>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02년 시집 『거미 』
『가뜬한 잠』 『자두나무 정류장』 등
<by 이 종원의 시 감상>
단편 순정 영화 한 편 혹은 공익 광고 한 편을 본
것 같은 개운함에 머리가 맑아진다. 도심에서 일
어난 에피소드가 아니라 시골의 간이 버스정류장
에서 발생한 분실한 기억을 고스란히 되찾게 된
시인의 시에서 간혹 발생하는 인간성의 회복과
죽어가는 감성을 같이 되살려내는 훈풍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아서
나는 종이배에 올려놓은 내 감성이 침몰하지 아니
하고 바다에까지 흘러간 것 같은 안도감에 작은 탄
성을 토해내게 되었다. 아마 기대하지 않았던 분실
에 대한 회수가 깨져버린 통쾌함이 시의 맛처럼 잔
잔하게 녹아있어서 씹는 내내 행복한 웃음이 입가
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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