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라는 구석 / 이병률
쓰나미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빈 공중전화부스 한 대를 설치해 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통하지도 않는 전하기를 들고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게 자기 슬픔을 말한다는데
남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하한 한 소녀는 줄곧 직진해서 걸었는데
촘촘하게 지뢰가 묻힌 밭을 걸어오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지뢰도 밟지 않았다는 것인지
가슴께가 다 뻐근해지는 이 일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나
색맹으로 스무 해를 살아온 청년에게
보정 안경을 씌워주자 몇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안경 안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벅차서라니
이 간절한 슬픔은 뭐라 할 수 있겠나
스무 줄의 문장으로는
영 모자랐던 몇 번의 내 전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상대는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시인의 약력>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파리
영화학교 ESEC 수료,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바다는 잘 있습니다』『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산문집 『끌림』 등
< by 이 종원의 시 감상>
영화를 한 편 본 것 같다. 시인이 경험한 것을
다큐로 제작한 것같은. 사실적이기에 감동적이
되었고 감동적이기에 슬픔이 살아나 동병상련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결국에는 요약할 수 없는
재주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진정한 슬픔을 꺼내
놓고 슬픔을 집어가게 만들었다. 결과만 보고
과정을 보지 않는다면 아마도 조금은 메마른 박
수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지 않을까?그러나
항상 진성성이라는 과정을 펼쳐보았을 때, 비로
서 한쪽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슬픔의 감동을
복합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상업 영
화보다 다큐 영화가 더 슬픔의 감정을 끌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시인이 열거해준 몇 가지
사례에서도 다큐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기에 나
또한 슬픔을 잠시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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