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 서정윤
밤을 꼬박 세워 바람 소리를 들었어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면
나머지 슬픔들도 곧 도착할 거라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어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말해 주지 않은 채
자신의 일들로 바빴어
반짝이는 나뭇잎에 다가가
말을 걸어도
햇볕이 필요하다는 대답뿐
내가 왜 우울한지는 묻지도 않았어
모든 변하는 것들 속에서
서서히 옅어지는 기억들
잊혀지는 게 싫어 창을 열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어 있었어
절대로 변하지 않는 건 없다고
인정해도, 숨겨진 연결 고리
하나라도 있었으면, 원했지
영원히 나만 알고 있을 비밀들로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
가장 힘든 걸 말해 버리라고
자꾸 유혹하지만
그럴 만한 용기도 없어
나에게 남은 너의 흔적을
이젠 남김없이 가져갔으면 좋겠어
<시인의 약력>
1957년 대구에서 출생. 영남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현대문학>지에 <화석> <겨울 해변가에서> 등이 김춘수
시인 추천으로. 시집 <홀로 서기>, <점등인의 별에서> 출간.
2012 제26회 금복문화상 문학부문 수상.
<by 이종원의 시 감상>
뒤돌아보면 지평선이 아득하게 보일지라도
그 속에서 내게 가장 기뻤고 즐거웠던 한순간과,
찢어지도록 아프고 슬펐던 기억 한 조각은 분명
흔적으로 자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길은 지루하지도 않고 또 한쪽으로 치우쳐
흐르지 않는 좌우 대칭의 모습을 보일 것이다.
밤새 태풍이 몰아칠 때에 멈추지 않을 고통과
불안이 엄습한다 해도 시간이 흐른 후에 맑은
하늘과 뜨거운 태양이 쏟아질 때는 상처와 고통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 수 십일 째
기록되는 폭염과 가뭄을 마감하고 비가 내리게 될 때,
그 장엄한 서사에 감동하는 것 또한 우리의 삶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리라. 호사다마의 인생 길, 새옹지마의 삶,
죽을 것 같은 실연의 아픔은 누군가 노래에서 ‘총 맞은
것처럼 ~’이라고 노래했을까??? 상처는 꿰매고 나면
흔적으로 남는 것, 그러나 그 흔적은 반면교사로 남은
삶에 있어서 지표가 될 수도 있다는 역설을 되뇌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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