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인 썸네일형 리스트형 잉여의 시간 / 나희덕 잉여의 시간 / 나희덕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더보기 마지막 산책 / 나희덕 마지막 산책 / 나희덕 우리는 매화나무들에게로 다가갔다 이쪽은 거의 피지 않았구나, 그녀는 응달의 꽃을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듯 입 다문 꽃망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땅은 비에 젖어 있었고 우리는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 병실로 돌아왔다 통증이 그녀를 잠시 놓아줄 때 꽃무늬 침대 시트를 꽃밭이라 여기며 우리는 소풍 온 것처럼 차를 마시고 빵조각을 떼었다 오후에는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문장들 속으로 난 숲길을 함께 서성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죽음, 이라는 말 근처에서 마음은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피지 않은 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침묵에 기대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에 입술도 가만히 그 말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응달의 꽃은 지금쯤 피었을까, 그.. 더보기 뜨거운 돌 / 나희덕 뜨거운 돌 나희덕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이 있네 그러면 내 스무 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한 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 화상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잡고 살았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있었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 더보기 오래된 수틀 / 나 희덕 오래된 수틀 / 나 희덕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지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에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나희덕 시인: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 졸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시집으로 , , , ..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