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수틀 / 나 희덕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지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에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나희덕 시인: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 졸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 곳이 멀지 않다>
<사라진 손바닥>, <어두워진다는 것> 등 다수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
<by 이종원의 감상>
시인의 첫 일성을 읽으며 나를 수놓았던 그 누군가을 더듬어 보았다
어릴 적 어머니와 누나는 수틀을 달고 살았다,
이불 보를 비롯해, 벽에 붙을 옷걸이의 옷을 덮는 보, 그리고 방석과 상보까지
수를 놓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것은 지금의 장식이나 사치가 아니라 생활이었으며 고단함에 대한 일련의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수를 놓음으로 아련한 삶에 대한 당신들에 대한 아주 작은 의지라는 생각도 든다
어쨋뜬 수를 놓았다는 것은 삶을 한땀한땀 설계하고 건축해왔다는 의미와 상통한다고 믿는다
아직 완성되지 않는 수!!!
그러나 이미 낡아버린 수틀!!!
그 삶을 보아왔기에, 그 생을 가슴에 담아왔기에 나는 어쩌면 자연스럽게 그 수를 닮아가고 있고
오래된 수틀이 이젠 빛을 잃었어도 수틀의 역할을 읽으며 그 수를 완성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짓는 일도, 수를 놓고 수를 완성해가는 길이기에, 팽팽하게 잡아당긴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이리라
오늘도 열심히 삶의 수를 놓고, 시의 수를 놓고, 또 다른 생의 수를 놓는 수 많은 사람들이 완성해나가고 있는
아름다운 오늘을 조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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