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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詩

남루 / 이건청

남루 / 이건청

 

 

 

 

안토니오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에 성당 앞에서

전차에 치였을 때, 전차 운전수는

남루한 작업복을 입은 그가

대성당 건축책임자라고는 생각 못하고

상처 깊은 사람을 전차 길 옆으로 치워놓고

가던 길로 가버렸다고 한다.

 

지나가던 사람이 택시를 세웠지만

운전수가 남루의 사람을 스쳐보곤

그냥 지나쳐 갔다고 한다

늦게서야 응급실에 닿았지만

병원이 또 이 남루의 사람을

내쳐버렸다고 한다.

아주 늦게서야

버려지고 버려진 이 남루의 노인이

조그만 시립 병원에 닿았는데

겨우 병상에 눕혀졌는데,

사그라다 파밀리에, 위대한 꿈의

전당을 세워가던 세기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남루에 가려 병상에 눕혀졌다가

거기서 숨이 멎었다 한다.

안토니오 가우디,

사그라다 파밀리에,

세계적 대성당의 설계 시공자

남루에 가려진 채 버려져 죽은...

 

 

<시인의 약력>

 



 1942년 경기도 이천 출생. 1970 現代文學 1월호에 시 '舊約(구약)'으로 박목월 선생의 추천 완료 등단. 시집 이건청 시집』 『목마른 자는 잠들고』 『망초꽃 하나』 『청동시대를 위하여』 『하이에나』 『코뿔소를 찾아서』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 『푸른 말들에 대한 기억』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굴참나무 숲에서』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실라캔스를 찾아서.

 

 

 

<by 이종원의 감상>

 

 

가우디의 죽음과 작금의 상황이 어쩌면 이렇게도 붙여넣기로 도플갱어인지 모를 전율을 느끼게 한다. 왜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외모와 외관에서 사람의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립스틱의 색깔이 화려하게 붉어졌고 옷자락엔 수를 놓고 나비의 날개처럼 나긋하게 닮아가고 있다는 설이 나돈 것은 아닐까?? 남루에서 건져낸 시인의 독백은 슬프고 처량한 인간의 모습을 간파하고 있다. 생명 존중의 본연에서 벗어나 재물과 직위로 또 다른 계급을 형성해내는 모습을 우리는 아직도 도처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또한 가우디의 죽음 과정에서 알게된 현상을 남루에 투영시켜주셨지만 결국은 앙금처럼 남는 인간의 다른 모습이 더 크게 다가와 참으로 안타까워 보인다. 시는, 그날에 펼쳐진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남루를 건져내는 선택을 동일하게 공식처럼 대입시켜줌으로 우리의 변화와 함께 숲이 아니라 나무를 볼 수 있게 되기를 우회적으로 주문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생명에 대하여는 경중과 대소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 눈은 무거운 저울 쪽으로 시선을 주고 손이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와 우리는 개별적으로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가우디이고 그리고 우리가 짓고 살아온 삶은 사그라다 파밀리에 대 성당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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