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 윤제림
울타리에 호박꽃 피었고
사립문 거적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안 갔다는 표시였다.
금방 돌아온다는 표시였다.
옛날엔.
그런 날이면, 들판을 지나온 바람이
대청마루에 누웠다 가곤 했다.
뒤꼍엔 말나리 피었고
방문 창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갔다는 표시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표시다.
지금은.
오늘 아침엔, 억수장마를 따라온
황토물이 사흘을 묵고 떠났다
<시인의 약력>
윤제림 / 1960년 충북 제천 출생, 인천에서 성장. 1987년 <<문예중앙》에 시로 등단. 시집 『삼천리호 자전거』 『미미의 집』 『황천반점』 『사랑을 놓치다』 『그는 걸어서 온다』 『새의 얼굴』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등. 동시집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
<by 이종원의 시 감상>
참으로 한가로운 정겨운 모습이었다가 폐가로 변해버린 삭막함이 묻어나는 안타까움이 엿보인다. 그러면서도 피곤한 육신이 한달음에 읽어 내려갈 수 있도록 산바람을 불어주는 것 같아 청량함을 느끼게 된다. 시인의 시들은 토속적인 맛이 있으며 향수를 일으켜 세워주는 기쁨이 있다. 빈 집이 모여있는 시골 풍경을 여행지로만 느끼게 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냄새 강한 청국장 쯤으로 보여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외갓집 향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된장 맛을 보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시의 맛은 여러 가지로 변화하며 때로는 퓨전을 쫓아가느라 허덕거릴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느릿한 행복을 구워먹는 시간이야 말로 휴가처럼 달콤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깊은 맛이 없다는 것이 아닌 것은 시의 행간에서 꺼내오는 공통분모에 발길이 머문다는 것이다. 세월이라는 시간이 몰아친 장마로 인하여 빈집은 더는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시인의 집에 줄줄이 걸려있는 싯구는 잘 익어 맛어 더욱 깊어진 것 같아 생각과 걸음이 잦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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