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카를 잃어버렸네 / 김재진
돌이켜보면 모두 사라져버렸네.
밤새워 이야기하던 친구도
영화 속의 주인공을 찾아 헤매던 발길도 지워져버렸네
십 년만에 만난 사람 앞에서도 무덤덤한,
잠깐의 반가움이 지나고 나면 시들해지는,
망각만이 유일한 나
저기 건물의 유리에 비친 나 또한
내가 아니네.
퀭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저 사내는 도대체 나일 수 없네.
황망히 바퀴 굴려
알 수 없는 복잡함 속으로 떠나는 저 자동차들만이
내가 있는 곳을 안다고 하네.
읽었던 한 권의 책
머리를 들끓게 하던 한때의 이념
열렬했던 사랑마저 내가 아니네.
하숙집 벽 위에 붙여놓았던
몇 줄의 잠언 속에도 나는 없네.
정말 하모니카를 잃어버렸네.
<시인의 약력>
김재진 시인, 소설가, 1955년 대구 출생, 계명대학교,1976년 영남일보,조선일보 신춘문예, 작가세계 신인상. 시집으로 <가슴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연어가 돌아올 때>,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와 장편소설 <하늘로 가는 길>, 동화집 <엄마의 나무>, <어느 시인의 이야기> 등이 있다
<by 이종원의 시 감상>
시인은 정말 하모니카를 잃어버렸을까? 반문으로 감상을 시작해 보았다. 시인의 하모니카는 어떤 음악이었고 어떤 음률이었으며 어떤 생각과 감성을 이입했을까 무한 상상력을 동원해 보았다. 내가 아는 하모니카는 아주 어렸을 적, 초,중학교 시절에 불어보았던 작은 악기였으며 음색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단조에 가까웠다. 지금은 정말 아주 드물게 조연 또는 조조연 쯤으로 사용되어지는 악기에 불과하지만, 그 파괴력은 가끔 엉첨난 반향을 끌어낼 때가 있음을 연주에서 종종 보게 된다. 시인의 시제도 그러함을 담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을 해본다. 시인은 청년 시절의 하숙집에서의 생활, 학창 시절과 젊음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암울함까지 하모니카 화음에 담아놓으려 한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하모니카 단어 하나만으로도 분명 그 어렵던 삶을 소환해 낼 것이며 유난히도 힘들었던 가난 속에서 작은 행복을 일구며 살아와 이룩한 오늘의 삶을 조명해 볼 것이다. 유명 가수의 백코러스로 연주되는 하모니카는 분명 추억이면서도 아픈 기억이고 동시에 행복한 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잃어버린 것은 맞지만 어서 다시 꺼내어 보라고, 그래서 다시 시작해 보라고, 그리고 그때 가지고 살았던 기쁨과 희망과 행복을 찾아보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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