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시인의 약력>
전남 강진 출생, 2018년 문화일보,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1회 농어촌희망문학상, 제2회 제주4.3문학상 대상.
제2회 천강문학상 시 부문 대상, 제9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상.
시집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by 이종원의 시 감상>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이다.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나름대로 싯적 우월성과 감동과 또 뛰어난 언어 및 어휘 구사를 자랑하고 있지만 <발코니의 시간>을 감상하면서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으며 지금까지 여운이 살아있다. 시인은 여러 공모전에서도 대상을 수상한 이력에서 보듯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크다. 필리핀에서 보았던 풍장의 모습을 평소에 발코니에서 화초를 가꾸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에 오버랩시켜 끌어낸 한 폭의 풍경은 실로 다큐의 한 장면 같아서 더 공감이 간다. 삶이란 허공과 공허 사이, 난간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다, 등의 구절에서는 짜릿한 시어의 진열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스토리 탄탄한 좋은 영화 한 편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직 그만큼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나의 한계에 대하여 갑자기 먹먹해지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시인의 시집을 주문해 시인의 다른 시에서도 감동과 행복을 저장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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