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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詩

잉여의 시간 / 나희덕

잉여의 시간 / 나희덕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시인의 약력>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 『야생 사과』『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시론집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

반통의 물 ,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

상 등 수상.

 

 

 

<by 이종원의 시 감상>

 

나희덕 시인의 시에서는 충분하고 풍요로운

시의 향이 흘러넘쳐 읽는 독자로 하여금

모자란 감성의 영역을 채우게 하는 힘이

있다. 그분의 시집을 읽고 있노라면 풍요로운

가을 들판의 황금물결을 대하는 것처럼 어느새

경외를 표하게 된다. 위 시에서 시인이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잉여의 시간과 잉여라는

단어와 싯구와 또 상상력이 살처럼 쏘아져 마음

이 달싹거리는순간 감정이입을 통해 빠르게 전

달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잉여란, 어쩌면 쓸모

없는 것처럼 보여 어딘가에 던져버릴 수도 있겠

다 생각하지만 실상 시인은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고 싶은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이 한줄의 문장으로 나는 매료의 방

점을 찍었다. 시인이 잘 다스려놓은 잉여의 시간

은 내가 가져가고 싶어서 조심스런 감상으로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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