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림체 / 유종인
눈꺼풀 내리면
깜박 저녁이 밤으로 머릴 디밀 것 같은 때
아까워라
도로 아까워서 저녁 하늘을 보느니
저 눈썹이 짙어진 하늘 가에
기러기 떼인가 청둥오리 떼인가
멀고 어둑해서 어느 것이어도 틀리지 않는 새 떼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채찍처럼
제 무리를 휘갈겨 간다
어디 한 번 내 허리에 아주 헐렁하게 감아 보고도 싶은
흘림체의 허리띠가
조였다 풀었다
내둘렀다 감았다
으늑한 운필(運筆)이 낙락한데
저 반가운 울음이 섞인
흘림체가 번지듯 내려앉은 곳,
거기 들판이나 샛강 가에 가며는
등 따신 햇빛을 쬐며 부리로 땅에 점자(點字)할 새 떼들,
그 흘림체가 모이 쪼는 곁에
나는 바람의 먹〔墨〕을 가는 나무로나 서 있을까
무엇을 쓰든 사랑의
허기를 면하는 길로
발길이 번지는 흘림체들
⸻계간 《시인수첩》 2020년 여름호
<시인의 약력>
1968년 인천 출생, 1996년《문예중앙》시부문 당선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 시집
『아껴 먹는 슬픔 』『교우록 』『사랑이라는 재촉들』
『양철지붕을 사야 겠다』『숲시집』시조집 『얼굴을 더듬다』등
<by 이 종원의 시 감상>
청둥오리나 기러기의 군무를 감상할 때면 그
속으로 날아 올라가고 싶은 마음 간절했는데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 춤사위는 혼자가
아닌 무리를 지어야만 가능한 춤인 것을 생각
할 때, 가끔은 무리에 같이 휩쓸려 군무를 추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취한 듯 갈겨쓴
흘림체의 멋처럼 시인은 그것과 동화 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 기꺼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먹으로 내어주는 나무와 사랑의
힘으로 허기를 면하는 생각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결하여 십이쪽 병풍처럼 서 있다. 새 떼의 군무
를 놓치지 않고 흘림체로 유연하게 그려준 시인의
광활한 시야가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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