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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詩

자두의 시간 / 마경덕

자두의 시간 / 마경덕

 

 

뒤뜰에 버려진 자두나무

흩어진 봄을 뭉쳐 서너 개 열매를 품었다

누군가 걷어차던 차디찬 밑동

봄볕에 데워 늦둥이를 얻었는데

둥지를 노리는 뱀처럼 바람이 가지를 타고 오른다

새파랗게 뒤집히는 이파리들

얼핏얼핏 드러난 얼굴들

잎사귀에 싸매둔 어린것, 바람의 혀가 닿는 순간

늙은 자두나무 뒷목이 뻣뻣해진다

자두의 심장이 채 붉기도 전에 바람은 왜 찾아오는 것일까

자두 한 알

아찔한 바닥으로 고꾸라질 때 질끈 눈을 감았는지,

주워든 손에 설익은 피가 묻는다

나무에게도 아픈 손가락이 있다

허전한 나뭇가지 어디쯤 빈자리 하나가 있을 것이다

 

시와정신2020. 가을호

 

 

<시인의 약력>

 

 

전남 여수 출생
2003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신발론』 『글러브 중독자』​ 『사물의 입』​ 

 

<by  이종원의 시 감상>

 

여름 중간 쯤이던가? 붉은 색이 연두를 휘감고 또아

리를 틀었을 때 자두 한 점을 입 안에 넣었다. 새콤

달콤한 맛이 혀를 붙들었고 나는 진실의 미간으로

과수의 향기와 해와 바람이 콜라보로 비벼놓은 맛을

여러 차례 들이켰던 기억이 난다. 이 시의 맛이 딱

그렇다. 시인은 덜 익어 떨어진 자두에게서 내 힘이

미치지 못해 못내 아쉬운 아픈 손가락을 에둘러 가르

키고 있는 것 같다. 잘 익어 특상품으로 팔려나간 맛

 이르지 못하고 시금털털한 맛의 대용품으로밖에

쓸 수 없는 손 안의 작은 앙금을 바라보는 것에서

나의, 우리, 부모의 아픈 손가락을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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