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사 / 신용목
지금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 물 끓는 소리에서 피어나는 물방울처럼
창문 너머 공터에는 단독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책장으로 가 시집을 펼치고 ‘라일락’이라는 글자 속에서 라일락 향기를 찾는다
지금 사라지는 것이 있다
텔레비전을 켜면
사랑해요, 고백은 영원히 죽지 않아서 사람이라는 숙주를 갈아타고 갈아타고
사랑해요, 지금쯤 저 배우는 퇴근했겠지
고백으로부터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 수없이 지나간 일요일이 덩그렇게 남겨놓은 오후
아파트에 살면서 갖다 놓은 화분
17층 공중의 작은 땅
달
나는 먹구름으로 다가가 비를 뿌린다 나의 블랙홀, 아파트가 끝나는 자리
대출 상환이 끝나는 자리
생활이 끝나는 자리
지금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 010번 마을버스는 어떻게 읽어야 하나
0으로 시작하는 것에는 지워지는 말이 있다
“동식이 기억나?”
사진을 들이밀며
“얘잖아!”
왜 모두들 동그란 얼굴을 가졌을까
어느 날 다 잊겠다는 메일을 받았다 달이 밤을 끓이고 있었다 얼마나 휘저었으면 그 많은 일 들이 저 어둠
곤죽 속으로 사라졌을까,
네 목소리가
내 얕은 머릿속에 어둠을 한 사발 덜어서는 후후 불며 밤새 퍼먹고 있다
-《시인동네》 2020년 8월호
<시인의 약력>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200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제19회 백석문학상, 제18회 현대시작품상, 제14회 노작문학상
제2회 시작문학상 수상
<by 이 종원의 시 감상>
모두가 사라지는 것에 익숙해져 간다. 내 기억도 사라
져 옛일을 놓치고 있는 것이 많다. 비어있는 머릿속과
구멍난 가슴을 메워보려고 새로운 것을 읽고 채우고
기록하고자 해도 지는 저녁놀처럼 바닷속으로 기억
이 이울고 있다. 그렇게 나의 일상은 기록되지 못하고
수면에 풀어진 물감처럼 불그스레 홍조만 잠시 띄우
다가 그 또한 쉽게 상실해가는 것이 다반사가 된다.
시인이 한 마디 툭 던지는 것처럼 나도 독백처럼 시
를 닮아간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그렇지 않으면 삶
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애써 위안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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