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들 / 조정인
생활 바깥으로 나가 생활을 간섭하는
죽은 적 없이 죽음의 내용을 출력하는 삶과 죽음의 얼굴 각도와
의상 패턴을 끝없이 바꿔가며 재배열하는
창문에 기댄 그⸱그녀들의 사소한 감정의 미풍과 회오리가
먼, 올리브 잎사귀를 흔들다가 해변의 검은 모래밭을 휩쓸고 지나가는
오타발로의 눈먼 샤먼 기도소리가 소나기처럼 들이치는
신의 폐허와 신생이 번갈아 출몰하는
고대인의 깨진 잠에서 빠져나온 그림자들이 도서관 열람실을
치렁치렁 배회하는, 혹간 그들의 어둑한 음성이 들려오는
늙은 수학자의 호주머니에 뒤척이는 에우클레이데스의 돌멩이와
양서류와 식물들의 혼이 일렁이는 허수의 꿈을
사막수도원의 긴 회랑이 소실점 바깥으로 하염없이 이어지는
폐가의 마룻장에 내려앉은 먼지와 이제 막 도착한 햇살을
그곳, 깨어진 창유리에도 어김없이 분배되는 아침과 저녁을
테두리도 중심도 시제도 없는 대평원의 흑암을
그곳에서 발송된, 봄날 아지랑이 아련한 흔들림을
한 송이 꽃을, 꽃 속에 부서지는 일만 파도를
낱장으로 재단해서 차곡차곡 묶은 이것을, 누가
책이라 했나
모든 불가능이 적힌 신의 완강한 주먹을 펴려는
무례한
불굴을
엎질러진 밤의 검은 포도주에 다 젖어
농담처럼 뭉개진
⸺계간 《모:든시》 2019년 봄호
<시인의 약력>
1998년 《창작과 비평 》등단, 제2회
토지문학제 시부문에서 대상.
시집『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장미의 내용』
동시집 『새가 되고 싶은 양파』
<by 이 종원의 시 감상>
단 한 글자로 불리어지는 ‘책’이란 글자와
‘시’라는 글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너무나 많은 영양분이 담겨 있어서
분류와 나눔에 혼돈을 겪는 것까지 비슷하
다. 시를 쓴다는 것이 취사선택의 어려움
속에서 어쩌면 편식의 조건에 맞추는 것
인지도 모르기에 책을 선정하고 정독하는
것과 시를 짓는 일이 지난하다는 것이다.
무한대로 들어있는 책속의 삼라만상을 끌
어내고 어떤 때는 감각과 생각을 엮은 환
상을 책 속에 스며놓는 일로 ‘책’과 ‘시’
는 서로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지도 모
른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 시와 책의 페이
지에 정교한 우주의 질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사용설명서를 보여주고 있기에 평
소 편식증이 있는 나는 시인의 페이지에서
좀더 섬세한 눈길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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