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원의 시 감상 썸네일형 리스트형 나뭇잎 편지 / 복효근 나뭇잎 편지 / 복효근 누가 보낸 엽서인가 떨어져 내 앞에 놓인 나뭇잎 어느 하늘 먼 나라의 소식 누구라도 읽으라고 봉인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길이 펼쳐놓은 한 뼘 면적 위에 얼마나 깊은 사연이기에 그 변두리를 가늠할 수 없다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렇게 발음할 수 없다는 듯 가장 깊은 사랑은 다만 침묵으로만 들려줄 수 있다는 듯 글자는 하나도 없어 보낸 이의 숨결처럼 실핏줄만 새겨져 있어 아무나 아무렇게나 읽을 수는 없겠다 누구의 경전인가 종이 한 장의 두께 속에서도 떫은 시간들은 발효되고 죄의 살들이 육탈하여 소멸조차 이렇게 향기로운가 소인 대신 신의 지문이 가득 찍힌 이 엽서는 보내온 그이를 찾아가는 지도인지도 모른다 언젠간 나도 이 모습으로 가야 하겠다 1962년 전북 남원 출생.. 더보기 빈집 / 윤제림 빈집 / 윤제림 울타리에 호박꽃 피었고 사립문 거적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안 갔다는 표시였다. 금방 돌아온다는 표시였다. 옛날엔. 그런 날이면, 들판을 지나온 바람이 대청마루에 누웠다 가곤 했다. 뒤꼍엔 말나리 피었고 방문 창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갔다는 표시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표시다. 지금은. 오늘 아침엔, 억수장마를 따라온 황토물이 사흘을 묵고 떠났다 윤제림 / 1960년 충북 제천 출생, 인천에서 성장. 1987년 더보기 남루 / 이건청 남루 / 이건청 안토니오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에 성당 앞에서 전차에 치였을 때, 전차 운전수는 남루한 작업복을 입은 그가 대성당 건축책임자라고는 생각 못하고 상처 깊은 사람을 전차 길 옆으로 치워놓고 가던 길로 가버렸다고 한다. 지나가던 사람이 택시를 세웠지만 운전수가 남루의 사람을 스쳐보곤 그냥 지나쳐 갔다고 한다 늦게서야 응급실에 닿았지만 병원이 또 이 남루의 사람을 내쳐버렸다고 한다. 아주 늦게서야 버려지고 버려진 이 남루의 노인이 조그만 시립 병원에 닿았는데 겨우 병상에 눕혀졌는데, 사그라다 파밀리에, 위대한 꿈의 전당을 세워가던 세기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남루에 가려 병상에 눕혀졌다가 거기서 숨이 멎었다 한다. 안토니오 가우디, 사그라다 파밀리에, 세계적 대성당의 설계 시공자 남루에 가.. 더보기 텃밭 / 김종해 텃밭 / 김종해 내가 뿌린 씨앗들이 한여름 텃밭에서 자란다 새로 입학한 나의 가족들이다 상추 고추 가지 호박 딸기 토마토 옥수수 등의 이름 앞에 김씨 성을 달아준다 김상추, 김고추, 김가지, 김호박, 김딸기..... 호미를 쥔 가장의 마음은 뿌듯하다 내 몸 잎사귀 가장자리마다 땀방울이 맺힌다. 흙 속에 몸을 비끄러매고 세상을 훔쳐보는 눈, 잡초의 이름 앞에도 김씨 성을 달아준다 잡초를 뽑아내는 내 손이 멈칫거린다 김잡초, 그러나 나는 단호하다 늘어나는 식구들 때문에 가장은 바쁘다 흙의 뜻을 하늘에 감아올리는 가장은 바쁘다 오늘은 아버지께 한나절 햇빛을 더 달라고 한다 목마른 내 가족들에게 한 소나기 퍼부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아아, 살아 있는 날의 기도여! 김종해(金鍾海, 1941년~ ) 부산에서 출생... 더보기 물의 종족 / 문성해 물의 종족 / 문성해 물만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불러본다 물고기 베고니아 버드나무 여름 들판의 옥수수들 그리고 삼 년 전 태안 바닷가에서 주워온 몽돌 한 개 그것은 물만 주면 반들반들한 정수리를 내게 보여주곤 했지 옛날 옛적 담뱃내 쩐 누런 방에서 죽은 외할머니도 사흘간 물만으로 사시다가 호르륵 날아가 버리셨지 혹서기의 뱁새처럼 나도 가끔은 물만으로 살고 싶은 저녁이 있네 물가에 앉아 물가가 주는 노래 물가가 주는 반짝거림만으로 환희에 찰 때 그건 물로만 살게 될 나의 마지막을 미리 체험하는 순간, 물만으로 살 수 있는 것들 최후를 사는 것들 느린 보행의 늙은 사마귀 늦여름 오후의 백일홍 저녁이 오기 전 저수지 위에서 마지막으로 반짝이는 것들 눈앞의 숲을 자신이 가진 가장 부드러운 움직임들로 마음껏 장.. 더보기 사과상자의 이설 / 전다형 사과상자의 이설 / 전다형 어떤 사과를 담았던 것일까 골목에는 각들이 없다 홀가분하게 속을 비워낸 상자가 각에 대해 각설 어제를 치고 오늘을 박다 뽑은 못 구멍 숭숭한 사과상자 눈에 밟혔는데 사과가 사회로 읽혔다 반쯤 아귀가 비틀린 자세로 골목을 물고 늘어졌다 상자가 불량한 자세로 한껏 감정을 부풀렸다 생채기에서 흐른 사과 진물이 그 진통을 기록해놓았다 아프면서 큰다는 말, 싸우면서 정든다는 이설 옹이에 옷을 걸고 햇살 쪽으로 기운 나이테 읽자 빈 사과상자 부둥켜안고 끙끙거린 내 안의 사과가 쏟아졌다 사과밭 모퉁이를 갉아먹던 사과 벌레가 내 늑골 아래 우글, 다 파먹을 요량이다 사과가 내 알량한 고집을 잡고 늘어졌다 사과를 비운 상자는 성자다 꺾인 전방 마주 선 내 볼록 눈거울이 맵다 경남 의령 .. 더보기 뜨거운 돌 / 나희덕 뜨거운 돌 나희덕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이 있네 그러면 내 스무 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한 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 화상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잡고 살았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있었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 더보기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 이 명윤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 이 명윤 내 마음의 강가에 펄펄, 쓸쓸한 눈이 내린다는 말이다 유년의 강물냄새에 흠뻑 젖고 싶다는 말이다 곱게 뻗은 국수도 아니고 구성진 웨이브의 라면도 아닌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나 오늘, 원초적이고 싶다는 말이다 너덜너덜해지고 싶다는 뜻이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도시의 메뉴들 오늘만은 입맛의 진화를 멈추고 강가에 서고 싶다는 말이다 어디선가 날아와 귓가를 스치고 내 유년의 처마 끝에 다소곳이 앉는 말 엉겁결에 튀어나온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뇌리 속에 잊혀져가는 어머니의 손맛을 내 몸이 스스로 기억해 낸 말이다 나 오늘, 속살까지 뜨거워지고 싶다는 뜻이다 오늘은 그냥, 수제비 어때, 입맛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당신, 오늘 외롭다.. 더보기 이전 1 ··· 7 8 9 10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