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원의 시 감상 썸네일형 리스트형 옥(屋) -소나무 / 윤제림 옥(屋) -소나무 / 윤제림 천금을 준대도 치마끈 한번 풀어본 적 없었네 데고 찢고 그슬리고 할퀴어 멍 천지 육신 피딱지 누더기를 감았어도 무명씨 억만세 뇌이며 살았네 살 저며 보리고개 죽조반 내고 눈물범벅 송화떡으로 꽃입술 주고 어둔 밤엔 팔목 꺾어 광솔불로 일어나 춤추었네 성한 목숨도 징징 오그라드는 이 삼동에 그 몸으로 그 몸으로 상기도 소리하네 부지깽이 같은 목으로 화젓가락 같은 울음을 우네 청산옥 그 여자 1960년 충북 제천 출생, 인천에서 성장. 1987년 더보기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 더보기 수배전단을 보고 / 윤성택 수배전단을 보고 / 윤성택 귀갓길에 현상수배 벽보를 보았다 얼마나 많은 곳에 그의 자유를 알려야 하는지 붉은 글씨로 잘못 든 生의 내력이 적혀 있다 어쩌다 저리 유명해진 삶을 지켜 봐달라는 것일까 어떤 부릅뜬 눈은 생경한 이곳의 나를 노려보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이름 석자로 수배중이다 납부 마감일로 독촉되는 고지서로 열자리 숫자로 배포된 전화번호로 포위망을 좁혀오는지도 모른다 칸 속의 얼굴은 하나 둘 붉은 동그라미로 검거되어 가는데, 나를 수배한 것들은 어디서 잠복중일까 무덤으로 연행되는 남은 날들, 그 어딘가 잡히지 않는 희망을 일망타진할 때까지 나는 매일 은신처로 귀가하는 것이다.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에 시 “수배전단을 보고”외 두편으로 등단. 2015년 올해의 젊은 .. 더보기 하모니카를 잃어버렸네 / 김재진 하모니카를 잃어버렸네 / 김재진 돌이켜보면 모두 사라져버렸네. 밤새워 이야기하던 친구도 영화 속의 주인공을 찾아 헤매던 발길도 지워져버렸네 십 년만에 만난 사람 앞에서도 무덤덤한, 잠깐의 반가움이 지나고 나면 시들해지는, 망각만이 유일한 나 저기 건물의 유리에 비친 나 또한 내가 아니네. 퀭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저 사내는 도대체 나일 수 없네. 황망히 바퀴 굴려 알 수 없는 복잡함 속으로 떠나는 저 자동차들만이 내가 있는 곳을 안다고 하네. 읽었던 한 권의 책 머리를 들끓게 하던 한때의 이념 열렬했던 사랑마저 내가 아니네. 하숙집 벽 위에 붙여놓았던 몇 줄의 잠언 속에도 나는 없네. 정말 하모니카를 잃어버렸네. 김재진 시인, 소설가, 1955년 대구 출생, 계명대학교,1976년 영남일보.. 더보기 오, 헨리의 편지 / 허영숙 오, 헨리의 편지 / 허영숙 우체부도 없이 저 편지들 어떻게 여기로 왔을까요. 다 읽기도 전에 또 쌓이는 편지에는 붉은 곡절만 가득합니다. 어제는 어둑신한 틈을 타고 누가 잎들을 모조리 뜯어가는 소리 들었습니다 스스로 버려야 할 때라는 것을 ,저 잎 보내지 않고서는 다시 여기 올 수 없다는 것을 바람도 안 까닭이겠지요. 일생이란 잠시 극적으로 머물다 지나가는 단편 같은 것인지요. 푸른 날의 비명조차 조용히 묻어야 하는 순간이 왔다는 전언에 자잘한 슬픔이 북받쳐 올라 마음이 자꾸만 안쪽으로 밀립니다. 한 잎의 간절함이 사람을 살리고, 상하게 해도 한 우주를 내어주어야 또 살 수 있으므로 붓으로 억지로 그릴 수 있는 목숨은 없다는 것, 억지로 풀어낼 어설픈 반전도 여기서는 쓸 수 없는 작법일 뿐 이라는 것,.. 더보기 7월, 아침밥상에 열무김치가 올랐다 / 김종해 7월, 아침밥상에 열무김치가 올랐다 / 김종해 흙은 원고지가 아니다. 한 자 한 자 촘촘히 심은 내 텃밭의 열무씨와 알타리무씨들, 원고지의 언어들은 자라지 않지만 내 텃밭의 열무와 알타리무는 이레만에 싹을 낸다. 간밤의 원고지 위에 쌓인 건방진 고뇌가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가를 텃밭에서 호미를 쥐어보면 안다. 땀을 흘려보면 안다. 물기 있는 흙은 정직하다. 그 얼굴 하나하나마다 햇살을 담고 사랑을 틔운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내 텃밭에 와서 일일이 이름을 불러낸다. 칠월, 아침밥상에 열무김치가 올랐다. 텃밭에서 내가 가꾼 나의 언어들. 하늘이여, 땅이여, 정말 고맙다. 김종해(金鍾海, 1941년~ ) 부산에서 출생. 1963년 《자유문학》 신인상에 당선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현대문학상, 한국.. 더보기 마지막 산책 / 나희덕 마지막 산책 / 나희덕 우리는 매화나무들에게로 다가갔다 이쪽은 거의 피지 않았구나, 그녀는 응달의 꽃을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듯 입 다문 꽃망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땅은 비에 젖어 있었고 우리는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 병실로 돌아왔다 통증이 그녀를 잠시 놓아줄 때 꽃무늬 침대 시트를 꽃밭이라 여기며 우리는 소풍 온 것처럼 차를 마시고 빵조각을 떼었다 오후에는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문장들 속으로 난 숲길을 함께 서성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죽음, 이라는 말 근처에서 마음은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피지 않은 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침묵에 기대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에 입술도 가만히 그 말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응달의 꽃은 지금쯤 피었을까, 그.. 더보기 미역귀 / 성영희 미역귀 / 성영희 미역은 귀로 산다 바위를 파고 듣는 미역줄기들 견내량 세찬 물길에 소용돌이로 붙어살다가 12첩 반상에 진수(珍羞)로 올려 졌다고 했던가 깜깜한 청력으로도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 귀로 자생하는 유연한 물살은 해초들의 텃밭 아닐까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한동안 난청을 앓는다 돌의 포자인가, 물의 갈기인가, 움켜쥔 귀를 놓으면 어지러운 소리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물결이 된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흘려 쓰는 해초들의 수중악보 흘려 쓴 음표라고 함부로 고쳐 부르지 마라 얇고 가느다란 음파로도 춤을 추는 물의 하체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헤엄쳐 온 물의 후음이 긴 파도를 펼치는 시간 잠에서 깬 귀들이 쫑긋쫑긋 햇살을 읽는다 물결을 말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햇살을 만나면 야멸치게 물의 뼈를.. 더보기 이전 1 ··· 6 7 8 9 10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