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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의 시 감상

숨어 사는 영혼처럼 / 강인한 숨어 사는 영혼처럼 / 강인한 외딴 섬으로 가는 다리였다. 버스는 오 분쯤 달려 섬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널 때 창밖으로 바다가 아득하였다. 파랗게 보이는 높고 소슬한 하늘, 아래에 어두운 보랏빛, 그 아래 먹구름과 양털구름이 뒤섞이고. 청동의 파도주름과 맑은 햇빛, 색색의 구름들, 높은 데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사이사이 구름을 뚫고 단숨에 꽂히는 바닥은 은빛 바다였다. 햇빛을 줄기줄기 온몸에 받아 적는 보얀 구름 커튼에 잡티 하나. 차창에 묻은 티끌일까 손가락으로 헤집는다. 점점 키워보니 아뜩한 하늘에 아, 숨어 사는 영혼처럼 혼자 날고 있는 새였다. ⸻격월간 《현대시학》 2019년 3-4월호 1944년 전북 정읍 출생, 전북대학교 국문과 졸업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집으로 『이상 기후』 .. 더보기
화살 / 김기택 화살 / 김기택 과녁에 박힌 화살이 꼬리를 흔들고 있다 찬 두부 속을 파고 들어가는 뜨거운 미꾸라지처럼 머리통을 과녁판에 묻고 온몸을 흔들고 있다 여전히 멈추지 않은 속도로 나무판 두께를 밀고 있다 과녁을 뚫고 날아가려고 꼬리가 몸통을 밀고 있다 더 나아가지 않는 속도를 나무 속에 욱여넣고 있다 긴 포물선의 길을 깜깜한 나무 속에 들이붓고 있다 속도는 흐르고 흘러 녹이 다 슬었는데 과녁판에는 아직도 화살이 퍼덕거려서 출렁이는 파문이 나이테를 밀며 퍼져나가고 있다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1989년 신춘문예 시 당선. 김수영문학상, 현대 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 『소』『껌』『갈라진다 갈라진다』『울음소리만 놔두고 .. 더보기
복숭아뼈 / 최금진 복숭아뼈 / 최금진 복숭아꽃 피던 시절 도시락을 싸서 너와 소풍 가던 기억 단단하다 너와 먹던 복숭아 조각이 어떻게 발목까지 내려가 복숭아뼈 화석이 되었을까 나는 너의 발뒤꿈치를 가만히 물었다 노리기 좋은 희디흰 발목이었으니까 달콤한 독 잔뜩 오른 독사가 되어 우리가 나뭇가지에 물컹물컹한 몸을 쪼개어 열려 거꾸로 익어갈 때 너무 오래 걸어와 돌아가는 길을 잊은 한 사람은 기꺼이 그 과실을 따먹었으니 너의 발목에 족쇄처럼 사랑은 자취를 남겼나니 복숭아뼈엔 복숭아 먹던 흔적이 있어서 네 희고 향긋한 발목을 보면 죄는 익어가고 아름다운 기억은 이렇게 모든 여정을 걸어와 발목에 모여 고였나니 그 굳어버린 호수의 뼈여, 둥근 바닥이여 복숭아꽃 피는 시절에 우리는 한 나무에 달려 우리의 유방과 엉덩이와 발그레한 얼.. 더보기
쌀나방 / 박성우 쌀나방 / 박성우 그냥 쌀이 아니라고 했다 아내는 어디선가 십 킬로짜리와 이십 킬로짜리 쌀을 두 포대나 배달시켰다 일체 약도 안 하고 키워서 몸에도 좋고 밥맛도 좋을 거라는 아내의 말은 맞았다 수수와 조를 섞어 지은 밥은 여간 맛이 좋은 게 아니어서 쌀 한 포대를 금방 비웠다 한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한동안 사라졌던 나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두 번째로 개봉해 먹고 있던 쌀을 휘저으며 살펴보니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쌀나방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무농약 쌀이 맞긴 맞나보네, 내 검지를 타고 오른 쌀나방은 식탁 쪽으로 씩씩하게 날아오르며 아무런 해가 없는 좋은 쌀이라는 걸 몸소 증명해 보여주기까지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문득 나는 나방을 먹고 사는 작은 새 한.. 더보기
예감 / 김사이 예감 / 김사이 낮술에 취한 남자씨들이 비틀거린다 인도를 장악하고 갈지자로 걸어온다 느닷없이 달려드는 일상의 예감들 차도로 내려설까 뛸까 망설이다가 눈이 부딪쳤다 그들과 교차하는 순간 풀린 눈으로 피식거리며 팔을 쭉 뻗는다 가슴을 팍 치고 간다 화가 나서 가방으로 내려치려니 키득거리면서 술집으로 들어간다 허공에 머물다 툭 떨어지는 가방 한참을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쫓아가서 싸울 용기까지는 내지 못한다 두려움은 내 몫이다 뒤통수로 그들의 웃음을 읽으며 주저앉았다 몇날 며칠 끙끙거리며 나를 달랜다 명백한 고의였으나 술에 취했으니 너그럽게 잊어주는 것도 내 몫이다 아무 이유가 없는 상식적인 날이다 -김사이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창비, 2018)에서 1971년 전남 해남 출생 호남.. 더보기
골목을 수배합니다 / 최정신 골목을 수배합니다 / 최정신 ​처음 걸음마를 떼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가르쳐 준 골목이었어요 밥 짓는 냄새가 그윽한 굴뚝이 구름을 복사하고 모퉁이마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내려다보던 전봇대가 온갖 바깥소식을 전하고 찹쌀떡, 메밀묵이 야경을 돌고 채송화, 분꽃, 과꽃, 코스모스가 계절을 데려다 주었어요 고무줄놀이로 근육을 키웠고 땅따먹기로 보폭을 키우기도 했어요 담 밑에 기대 서러움도 달랬고 첫사랑을 빙자해 입술도 훔쳐 갔어요 처마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된장찌개 냄새를 날리며 이마를 맞댄 창가에 구절양장 낭만이 깜박이던 백열등 따스한 불빛은 어디쯤 있을까요 주차금지 팻말에 서정을 빼앗긴 골목 어느 날 굴착기란 괴물이 들이닥쳐 골목이란 골목은 죄다 부수고 박살을 냈어요 골목에서 은혜를 입은 아이들이 자본주의 .. 더보기
뿌리의 방식 / 박종인 뿌리의 방식 / 박종인 죽은 듯이 앙상한 나무가 날씨의 위로를 받자 부스스 눈을 뜨기 시작했다 봄볕 한 사발로 메마른 입술에 생기가 돌았다 이것은 가능성이다 예상은 빗나가거나 적중한다 절반이 확률을 넘었을 때 봄이다 잘려진 목을 접목하는 기술자들, 전문가의 손이 빛나는 철이다 무르익어 번창한 시기는 봄의 중년, 중년은 녹음과 그늘로 이어진다 봄의 뿌리에서 출발한 계절의 마디들, 네 개의 뿌리는 네 개의 매듭을 지닌다 되풀이되는 기술에 나이테가 그려진다 봄의 고리에 들러붙은 수많은 죽음들, 한 번의 죽음 위에 안간힘이 다녀가고 바람의 피가 서늘해진다 그늘을 좇아 모여든 것들은 그늘의 변심으로 다시 흩어지고 부활을 꿈꾸는 가능성은 어둠 속에 웅크린다 ⸺시집 『연극무대』 2020년 9월 전북 무주 출생 201.. 더보기
오직, 바람 / 김 산 오직, 바람 / 김 산 고추와 상추와 딸기와 방울토마토 모종을 심었다 해바라기와 케일과 샐비어 씨앗도 뿌렸다 매일같이 조리개로 한가득 물을 주고 퇴비도 주고 잡초도 솎아주었다 양껏 물을 머금은 식물들은 하루가 다르게 키가 자랐고 가지를 자르고 지주대를 박자 줄기들이 꼿꼿하게 올라왔다 중심을 잡아줘야 열매가 맺힐 거라 생각을 했다 문득, 중심이 사라져야 바람이 춤을 출 거란 생각을 했다 지주대를 뽑아버리자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휘청거리던 식물들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비스듬히 무너지면서 오롯해지고 있었다 심지도 뿌리지도 않은 민들레 한 송이가 화단 모서리 콘크리트를 비집고 칠렐레팔렐레 춤을 추고 있었다 빛도 물도 흙도 없이 바람만으로 온 세계를 뒤흔들고 있었다 ⸻계간 《시사사》 2020년 여름호 1976년 충..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