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공 / 성영희
그에게 깨끗한 옷이란 없다
한 가닥 밧줄을 뽑으며 사는 사내
거미처럼 외벽에 붙어
어느 날은 창과 벽을 묻혀오고
또 어떤 날은 흘러내리는 지붕을 묻혀 돌아온다
사다리를 오르거나 밧줄을 타거나
한결같이 허공에 뜬 얼룩진 옷
얼마나 더 흘러내려야 저 절벽 꼭대기에
깃발 하나 꽂을 수 있나
저것은 공중에 찍힌 데칼코마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작업복이다
저렇게 화려한 옷이
일상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 거미가 정글을 탈출할 때
죽음에 쓸 밑줄까지 품고 나오듯
공중을 거쳐 안착한 거미들의 거푸집
하루 열두 번씩 변한다는 카멜레온도
마지막엔 제 색깔을 찾는다는데
하나의 직업과 함께 끝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내려온 벽면에는 푸른 싹이 자라고
너덜거리는 작업복에도
온갖 색의 싹들이 돋아나 있다
- 201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인의 약력>
충남 태안 출생, 시마을 동인
2017년 대전일보,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동서문학상> <농어촌 문학상> 수상, 인천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시집 『섬, 생을 물질하다』 『귀로 산다』
<by 이종원의 시 감상>
분명 아파트 벽면에 페인트를 칠하는 모습인데 페인트
냄새가 아닌 크레파스나 물감의 냄새가 나게 하는 것이
시인의 장점이다. 땀 냄새 가득한 작업복을 청정한 하늘빛이나
상큼한 초록빛 그리고 단풍과 같은 낭만까지, 이러한 시인의
붓질에 어찌 상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인의 수상 전
습작을 읽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면서도
고퀄리티 언어로 시전하는 시인의 능력은 배우고 싶고 얻어가고
싶어 늘 독백을 낳게도 했다. 시인을 잘 아는 누군가가 엄청난
노력과 습작과 또 창작의 산고를 겪었다고 전했다. 당연함이라
생각한다. 시에서 적시한 대로 제 색깔을 찾는 카멜레온처럼
그리고 하나의 직업과 함께 끝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외치는 싯구 한 줄이 시인의 진정성이고 또한 나도 걸어가야 할
시의 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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