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치 / 손준호
뿌리가 비스듬히 깊네요
사랑니를 뽑고 당신 발치에 누워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반백을 동거하였으니
눅눅했던 시간의 흔적이 웅덩이처럼 파였어요
뿌리 뽑힌 곳엔 뿔이 나지요
땅이든 잇몸이든 퉁퉁 붓고 멍들 수 있어요
한술 뜨려면 두 시간은 솜 물고 있어야 해요
맘이 자꾸 쓰이고 혀가 저절로 가닿게 됩니다
난 자리는 그런 곳이죠
먼발치인가 싶어 돌아보면 없는,
지붕 위에 던져진 젖니는 누가 물고 갔을까요
콩닥콩닥, 가슴팍에 키우던 새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슬픔은 어둠 속에서 뿌리째 번식합니다
발칫잠에서 등걸잠에서 새우잠으로
엄니로부터 엄니의 엄니로부터 유전하는 뿌리들
짐승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엄니라 부른대요
슬픔을 물고 늘어지려면 이빨 없인 안 되죠
햇살 갉아먹던 후박나무 이파리를 봤어요
어금니로 허공을 깨물던 세이지 꽃잎을 봤어요
그러나 한겨울이면 송두리째 몽니를 거두고
뿌리 발치에 스스로 거름이 되는 용기를 봐봐요
마스크 끼고 실밥 풀러 가야겠어요
겸손의 뿌리가 얼마나 얕은지 벌써 캔맥주가 생각나요
당신 발치 누워 줄거리 뻔한 일일연속극을 보면서
병든 나의 텍스트가 차츰 호전되었으면 좋겠어요
서울 하늘은 또 함박눈을 뿌린다는 일기예보예요
- 2021년 계간《시산맥》신인문학상 수상작
<시인의 약력>
1971년 경북 영천 출생
계명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2020년 노계 문학백일장 우수상(시조) 수상
2021년 계간《시산맥》신인문학상 수상
<by 이 종원의 시 감상>
썩은 것 또는 흔들거리는 이를 뽑아내는
것으로부터 시인이 뽑아낸 것은 발치된
이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리에 시의
뿌리를 심고자 한 것 같아 보인다. 이곳
저곳을 같이하던 사람들과 오랫동안 사용
하던 것을 덜어내고 나면 난 자리가 허전
한 것처럼, 시를 생산하지 못하고 덮어둔
시샘이 쓸쓸하였는데 톡톡 건드려준 시인
의 썩션으로 통증을 딛고 맛을 씹을 수
있게 해준 것에 감사한다. 덕분에 시의
뿌리는 제대로 내리고 창작의 연대기는
쉬임없이 이어지리라는 믿음을 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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