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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詩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걷는나무, 2014)중에서

 

<시인의 약력>

 


 

 

1945년 순천 출생
중앙대 국문과 졸업
1973월간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청명』『영혼의 눈』『첫차』『눈먼 사랑
편운문학상, 한성기문학상 등 수상

 

 

<by 이종원의 시 감상 >

 

사물을 과학적으로 보고 판단한다면 참으로 메마르고

딱딱하여 맛이 없을 것인데 시의 눈을 가진 시인의 

눈이 제대로 사물을 꽃피워 보는 사람의 가슴에 들어

서게 해주기 때문에 독자는 즐겁고 행복해지는 것이

리라. 벼가 잘려나간 논과 눈 덮인 들판의 황량함과 

무미에서 갑자기 채색 옷을 입혀주고 수십가지 물감

으로 색을 칠해준 덕분에 나는 생각의 줄기에 여러 

가지 옷을 입혀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차갑고 

황량한 적막함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어서 좋다. 

인이 얹어준 요술피리의 한 자락이 무너져 내리거나 

얼어붙을 것 같은 마음에 온기를 넣어주는 아궁이 불 

같아서 곁불을 감사하게 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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