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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詩

가는 비 온다 / 기형도

가는 비 온다 / 기형도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지, 1991)

 

 

 

<시인의 약력>

 


 

1960년 경기도 옹진 출생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1989년 뇌졸중으로 별세하였으며,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출간

 

 

 

< by  이 종원의 시 감상>

 

시의 제목이 주는 반어의 의미가 설핏 생각났지만

가는 비의 가는이 가느다랗다는 의미인지, 지나가

는 비인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는

지나가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나도 ‘Holiday’

를 부르는 탈옥수의 외침을 들은 기억이 있다. 

외침은 결국 지나가지 못하고 가늘게 끝이나 버렸

고 오지 못했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부지

기수인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는 것을 기대하

지 못하고 빠른 답을 구하려 전당포로 달려가 시간

을 맡기고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가는 비는 사람

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시인의 말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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