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대한 단상 / 윤석호
1
맨 처음 길을 간 사람은 길이 아닌 길을 간 것이다
나그네가 외로운 것은 길 때문이다
길은 근원적인 고독
같은 길을 둘이 갈 수는 없다
꿈이란 몸부림치며 한밤에 혼자 꾸는 것이다
그는 그 길로 되돌아왔을까
2
길이 막혔다는 말은 있어도 끝났다는 말은 없다
길이 막히면 길은 그 자리에 잠복한다
비 오는 날 유리창에 떨어진 빗물
머뭇거리지만 스스로
길을 만들며 흘러내린다
길 안에는 또 다른 길들이 내장되어 있다
3
반복되는 길은 길이 아니다
벽에 묶여 평생을 맴도는 시계도
한번 지난 시간은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
몸통을 타 태우고서야 지구를 벗어난 우주선처럼
문을 나선 나에게는 길 뿐이었다
꿈이 길을 만들어내겠지만 때로, 길에 맡기고 가다 보면
어느 날 꿈꾸는 별을 만나게 되리라
나는 지금 내 길의 어디쯤 서 있는가
4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온 연어
생이 빠져나가고 본능만 남아 헐떡거린다
그에게 길은 무엇이었나
도착한 곳이 목적지 인지 묻지도 않고
헐거워진 몸뚱이를 털어 다음 생을 쏟아 낸다
목적지가 처음부터 길의 일부였다는 것을
연어는 알고 있었을까
<시인의 약력>
1964년 부산 출생, 2011년 미주《중앙신인문학상》 당선,
2014년 <부산일보>신춘문예 당선,시집 『4인칭에 관하여』
<by 이 종원의 시 감상>
시의 길 또한 끝이 없다, 둘이 같은 생각을 놓을
수 없다, 반복되는 길도 아니어서 막힌 길을 뚫고
서라도 헤쳐나가야 하는, 시인의 길로 읽힌다.
완성의 경지는 걸어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
시인이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가보
지 않고서 길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 길이 끝났다
라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안타까워 몸소
체험한 길을 알려주려는 지표로서의 역할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마지막 구절에 연어의 회귀와
모성으로 확신에 찬 길의 정의를 내려놓고 있다.
시 또한 걸어온 길에 대한 기록과 시의 알을 낳아
부화시키고자 계속하여 되풀이하는 회귀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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