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된 어느 저녁 / 이화영
꽃이 온다
저녁이 와도 우리는 흩어져 있었다
식탁에는 아무것도 없고
없는 것보다 많은 식탁보 레이스는
낡은 자세로 공기방울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거실의 사물들이 표정 없이 어두워져간다
사료를 씹는 고양이 소리가 부럼 깨는 소리 같아
의식을 치르듯 무릎을 꿇었다
익명의 첫 문자를 칼질하며
어디로 튈까 망설이는 기울어진 5시
바람이 베란다 창문을 흔들고
깨진 화분조각 흙속에 고양이 발톱이 찍혀있다
지문을 남기는 도발적 메시지를 해독하지 않았다
도화선 같은 불빛이 거리에 흐르면
집들은 대개 비슷하게 행복하거나 조금씩 다르게 불행하다
우유‧마우스‧소주‧삼겹살‧밥공기‧드레싱과
강남역 10번 출구는 같은 맥락이다
치아를 닮은 사탕을 사면서 꿈이 없기를 바랬다
담장 너머 백일홍은 오늘도 답장이 없다
—《불교문예》2017년 여름호
<시인의 약력>
2009년《정신과 표현》신인상 등단
시집『침향』『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by 이 종원의 시 감상>
지금은 저녁이 살아나고 시간이 회복되어가고
있는 세상이지만 얼마전까지 코로나로 빠른 귀
가 및 금지된 외출로 독방에 구금되었던 저녁은
얼마나 슬픈 일이었던가! 지금은 코로나 이전,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몸과 마음이 다시 집밖,
도심 속으로 몰려가 빈 공간을 채워가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나 아직 불완전의 시간, 시의
행간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시간들을
꺼내본다. 혼자 저녁을 맞이하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커피를 마시던 혼 시리즈의 날이 누구를 쉽
게 제외해줄 수 없는 것이기에 완벽하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시인이 지적한 끼리끼리 행복해지
거나 조금씩 다르게 불행해지는 것을 예측할 수는
없는 것처럼 폐기되는 것은 저녁 뿐 아니라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락이었던 것을 기다림으로 지
켜온 날들에 강한 아쉬움이 남는다, 강남역 10번
출구가 출구 전부는 아니기에 흩어지는 방향 속에
서 나도 투명한 벽을 넘어서기 위해 담장 너머의
백일홍에 하염없이 추파를 보냈던 일이 생각나서
공감의 눈물을 헐렁한 박수 속에 덮어두고 있다.
'내가 읽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날개의 주소 / 임동윤 (0) | 2023.02.17 |
---|---|
넙치 / 김경후 (0) | 2023.02.17 |
고등어 자반 / 오영록 (1) | 2023.02.17 |
길에 대한 단상 / 윤석호 (2) | 2023.02.17 |
시계 수리공의 장례식 / 박서영 (0) | 2023.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