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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아침밥상에 열무김치가 올랐다 / 김종해 7월, 아침밥상에 열무김치가 올랐다 / 김종해 흙은 원고지가 아니다. 한 자 한 자 촘촘히 심은 내 텃밭의 열무씨와 알타리무씨들, 원고지의 언어들은 자라지 않지만 내 텃밭의 열무와 알타리무는 이레만에 싹을 낸다. 간밤의 원고지 위에 쌓인 건방진 고뇌가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가를 텃밭에서 호미를 쥐어보면 안다. 땀을 흘려보면 안다. 물기 있는 흙은 정직하다. 그 얼굴 하나하나마다 햇살을 담고 사랑을 틔운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내 텃밭에 와서 일일이 이름을 불러낸다. 칠월, 아침밥상에 열무김치가 올랐다. 텃밭에서 내가 가꾼 나의 언어들. 하늘이여, 땅이여, 정말 고맙다. 김종해(金鍾海, 1941년~ ) 부산에서 출생. 1963년 《자유문학》 신인상에 당선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현대문학상, 한국.. 더보기
마지막 산책 / 나희덕 마지막 산책 / 나희덕 우리는 매화나무들에게로 다가갔다 이쪽은 거의 피지 않았구나, 그녀는 응달의 꽃을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듯 입 다문 꽃망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땅은 비에 젖어 있었고 우리는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 병실로 돌아왔다 통증이 그녀를 잠시 놓아줄 때 꽃무늬 침대 시트를 꽃밭이라 여기며 우리는 소풍 온 것처럼 차를 마시고 빵조각을 떼었다 오후에는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문장들 속으로 난 숲길을 함께 서성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죽음, 이라는 말 근처에서 마음은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피지 않은 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침묵에 기대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에 입술도 가만히 그 말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응달의 꽃은 지금쯤 피었을까, 그.. 더보기
미역귀 / 성영희 미역귀 / 성영희 미역은 귀로 산다 바위를 파고 듣는 미역줄기들 견내량 세찬 물길에 소용돌이로 붙어살다가 12첩 반상에 진수(珍羞)로 올려 졌다고 했던가 깜깜한 청력으로도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 귀로 자생하는 유연한 물살은 해초들의 텃밭 아닐까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한동안 난청을 앓는다 돌의 포자인가, 물의 갈기인가, 움켜쥔 귀를 놓으면 어지러운 소리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물결이 된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흘려 쓰는 해초들의 수중악보 흘려 쓴 음표라고 함부로 고쳐 부르지 마라 얇고 가느다란 음파로도 춤을 추는 물의 하체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헤엄쳐 온 물의 후음이 긴 파도를 펼치는 시간 잠에서 깬 귀들이 쫑긋쫑긋 햇살을 읽는다 물결을 말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햇살을 만나면 야멸치게 물의 뼈를.. 더보기
나뭇잎 편지 / 복효근 나뭇잎 편지 / 복효근 누가 보낸 엽서인가 떨어져 내 앞에 놓인 나뭇잎 어느 하늘 먼 나라의 소식 누구라도 읽으라고 봉인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길이 펼쳐놓은 한 뼘 면적 위에 얼마나 깊은 사연이기에 그 변두리를 가늠할 수 없다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렇게 발음할 수 없다는 듯 가장 깊은 사랑은 다만 침묵으로만 들려줄 수 있다는 듯 글자는 하나도 없어 보낸 이의 숨결처럼 실핏줄만 새겨져 있어 아무나 아무렇게나 읽을 수는 없겠다 누구의 경전인가 종이 한 장의 두께 속에서도 떫은 시간들은 발효되고 죄의 살들이 육탈하여 소멸조차 이렇게 향기로운가 소인 대신 신의 지문이 가득 찍힌 이 엽서는 보내온 그이를 찾아가는 지도인지도 모른다 언젠간 나도 이 모습으로 가야 하겠다 ​ ​ ​​ ​ 1962년 전북 남원 출생.. 더보기
빈집 / 윤제림 빈집 / 윤제림 울타리에 호박꽃 피었고 사립문 거적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안 갔다는 표시였다. 금방 돌아온다는 표시였다. 옛날엔. 그런 날이면, 들판을 지나온 바람이 대청마루에 누웠다 가곤 했다. 뒤꼍엔 말나리 피었고 방문 창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갔다는 표시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표시다. 지금은. 오늘 아침엔, 억수장마를 따라온 황토물이 사흘을 묵고 떠났다 윤제림 / 1960년 충북 제천 출생, 인천에서 성장. 1987년 더보기
남루 / 이건청 남루 / 이건청 안토니오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에 성당 앞에서 전차에 치였을 때, 전차 운전수는 남루한 작업복을 입은 그가 대성당 건축책임자라고는 생각 못하고 상처 깊은 사람을 전차 길 옆으로 치워놓고 가던 길로 가버렸다고 한다. 지나가던 사람이 택시를 세웠지만 운전수가 남루의 사람을 스쳐보곤 그냥 지나쳐 갔다고 한다 늦게서야 응급실에 닿았지만 병원이 또 이 남루의 사람을 내쳐버렸다고 한다. 아주 늦게서야 버려지고 버려진 이 남루의 노인이 조그만 시립 병원에 닿았는데 겨우 병상에 눕혀졌는데, 사그라다 파밀리에, 위대한 꿈의 전당을 세워가던 세기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남루에 가려 병상에 눕혀졌다가 거기서 숨이 멎었다 한다. 안토니오 가우디, 사그라다 파밀리에, 세계적 대성당의 설계 시공자 남루에 가.. 더보기
텃밭 / 김종해 텃밭 / 김종해 내가 뿌린 씨앗들이 한여름 텃밭에서 자란다 새로 입학한 나의 가족들이다 상추 고추 가지 호박 딸기 토마토 옥수수 등의 이름 앞에 김씨 성을 달아준다 김상추, 김고추, 김가지, 김호박, 김딸기..... 호미를 쥔 가장의 마음은 뿌듯하다 내 몸 잎사귀 가장자리마다 땀방울이 맺힌다. 흙 속에 몸을 비끄러매고 세상을 훔쳐보는 눈, 잡초의 이름 앞에도 김씨 성을 달아준다 잡초를 뽑아내는 내 손이 멈칫거린다 김잡초, 그러나 나는 단호하다 늘어나는 식구들 때문에 가장은 바쁘다 흙의 뜻을 하늘에 감아올리는 가장은 바쁘다 오늘은 아버지께 한나절 햇빛을 더 달라고 한다 목마른 내 가족들에게 한 소나기 퍼부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아아, 살아 있는 날의 기도여! 김종해(金鍾海, 1941년~ ) 부산에서 출생... 더보기
물의 종족 / 문성해 물의 종족 / 문성해 물만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불러본다 물고기 베고니아 버드나무 여름 들판의 옥수수들 그리고 삼 년 전 태안 바닷가에서 주워온 몽돌 한 개 그것은 물만 주면 반들반들한 정수리를 내게 보여주곤 했지 옛날 옛적 담뱃내 쩐 누런 방에서 죽은 외할머니도 사흘간 물만으로 사시다가 호르륵 날아가 버리셨지 혹서기의 뱁새처럼 나도 가끔은 물만으로 살고 싶은 저녁이 있네 물가에 앉아 물가가 주는 노래 물가가 주는 반짝거림만으로 환희에 찰 때 그건 물로만 살게 될 나의 마지막을 미리 체험하는 순간, 물만으로 살 수 있는 것들 최후를 사는 것들 느린 보행의 늙은 사마귀 늦여름 오후의 백일홍 저녁이 오기 전 저수지 위에서 마지막으로 반짝이는 것들 눈앞의 숲을 자신이 가진 가장 부드러운 움직임들로 마음껏 장..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