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사과상자의 이설 / 전다형 사과상자의 이설 / 전다형 어떤 사과를 담았던 것일까 골목에는 각들이 없다 홀가분하게 속을 비워낸 상자가 각에 대해 각설 어제를 치고 오늘을 박다 뽑은 못 구멍 숭숭한 사과상자 눈에 밟혔는데 사과가 사회로 읽혔다 반쯤 아귀가 비틀린 자세로 골목을 물고 늘어졌다 상자가 불량한 자세로 한껏 감정을 부풀렸다 생채기에서 흐른 사과 진물이 그 진통을 기록해놓았다 아프면서 큰다는 말, 싸우면서 정든다는 이설 옹이에 옷을 걸고 햇살 쪽으로 기운 나이테 읽자 빈 사과상자 부둥켜안고 끙끙거린 내 안의 사과가 쏟아졌다 사과밭 모퉁이를 갉아먹던 사과 벌레가 내 늑골 아래 우글, 다 파먹을 요량이다 사과가 내 알량한 고집을 잡고 늘어졌다 사과를 비운 상자는 성자다 꺾인 전방 마주 선 내 볼록 눈거울이 맵다 경남 의령 .. 더보기 뜨거운 돌 / 나희덕 뜨거운 돌 나희덕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이 있네 그러면 내 스무 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한 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 화상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잡고 살았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있었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 더보기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 이 명윤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 이 명윤 내 마음의 강가에 펄펄, 쓸쓸한 눈이 내린다는 말이다 유년의 강물냄새에 흠뻑 젖고 싶다는 말이다 곱게 뻗은 국수도 아니고 구성진 웨이브의 라면도 아닌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나 오늘, 원초적이고 싶다는 말이다 너덜너덜해지고 싶다는 뜻이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도시의 메뉴들 오늘만은 입맛의 진화를 멈추고 강가에 서고 싶다는 말이다 어디선가 날아와 귓가를 스치고 내 유년의 처마 끝에 다소곳이 앉는 말 엉겁결에 튀어나온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뇌리 속에 잊혀져가는 어머니의 손맛을 내 몸이 스스로 기억해 낸 말이다 나 오늘, 속살까지 뜨거워지고 싶다는 뜻이다 오늘은 그냥, 수제비 어때, 입맛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당신, 오늘 외롭다.. 더보기 꼬리의 진화 / 김 유석 꼬리의 진화 / 김 유석 모모와 미미, 내게 묶인 두 마리 얼치기 공연히 마주보며 짖는다. 제가 묶인 줄도 모르고 묶여 있는 서로를 짖어대는 것인가. 묶인 것들은 함께 있어도 외로울 때가 있는가. 가까이 있는 외로움이란 발정 난 제 몸을 미친 듯 핥는 모습보다 절절할지 모를 일 줄을 풀었다. 개처럼 날뛰는 두 마리 개가 보인다. 긁어대고 으르렁거리고 뒹구는 몸짓 외 묶이지 않는 외로움은 없을까 쉽게 풀어지는 저 작태가 외로움일까 몇일간 밖을 싸돌던 퀭한 눈구석이 꼬리를 앞세우고 돌아와 밥그릇 옆에 웅크리는 모습이 외로움일까 먹이를 잘 찾는 놈이 우두머리가 되는 늑대의 족속에서 밀려 인간에 귀화할 무렵 흔들기 시작했을 꼬리, 먹이 찾는 법을 잊고 묶인 사실만 기억하게 된 꼬리는 저 자신을 향한 사디즘* 고.. 더보기 오래된 수틀 / 나 희덕 오래된 수틀 / 나 희덕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지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에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나희덕 시인: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 졸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시집으로 , , , .. 더보기 터미널의 키스 / 윤 제림 터미널의 키스 / 윤 제림 터미널 근처 병원 장례식장 마당 끝 조등 아래서 두 사람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죽음과 관계 깊은 일, 방해될까봐 빙 둘러 지하철을 타러 갔다. 휘적휘적 걸어서 육교를 건너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입맞춤은 끝났을까, 돌아가 내려다보니 한 사람만 무슨 신호등처럼 서서 울고 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그 사람이 나를 쳐다보며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라는지 가라는지 손수건을 흔들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윤제림 (윤준호) 대학교수, 시인 출생 1960년 1월 21일 (만 55세), 충북 제천시 소속 서울예술대학 학력 동국대학교 국문과 데뷔 1987년 문예중앙 시 '뿌리 깊은 별들을 위하여' 수상 2014 제14회 지훈문학상 외 3건 경력.. 더보기 숨어 사는 영혼처럼 / 강인한 숨어 사는 영혼처럼 / 강인한 외딴 섬으로 가는 다리였다. 버스는 오 분쯤 달려 섬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널 때 창밖으로 바다가 아득하였다. 파랗게 보이는 높고 소슬한 하늘, 아래에 어두운 보랏빛, 그 아래 먹구름과 양털구름이 뒤섞이고. 청동의 파도주름과 맑은 햇빛, 색색의 구름들, 높은 데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사이사이 구름을 뚫고 단숨에 꽂히는 바닥은 은빛 바다였다. 햇빛을 줄기줄기 온몸에 받아 적는 보얀 구름 커튼에 잡티 하나. 차창에 묻은 티끌일까 손가락으로 헤집는다. 점점 키워보니 아뜩한 하늘에 아, 숨어 사는 영혼처럼 혼자 날고 있는 새였다. ⸻격월간 《현대시학》 2019년 3-4월호 1944년 전북 정읍 출생, 전북대학교 국문과 졸업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집으로 『이상기후』 『.. 더보기 이전 1 ··· 25 26 27 2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