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읽은 詩

쑥 / 박은영 쑥 / 박은영 넓은 들판이었다 우물가 동백꽃도 다 떨어진 조용한 오후였다 어머니는 햇빛을 등진 채 어린 쑥의 시린 발꿈치를 어루만졌다 살아온 세월만큼 더딘 걸음으로 옮겨가는 당신의 갈라진 손끝은 푸른 물이 배고 대소쿠리는 이른 봄으로 묵직했다 산 벚나무 환하게 눈을 뜨는 봄 먼 들판을 보고 있으면 입안에 쓴물이 고였다 쓰디쓴 봄의 흔적을 지우고 양지 바른 자리에 웅크린 어머니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된장뚝배기가 끓고 찰진 떡 치대는 소리가 났다 엄마 엄마 부르면 꽃대 같은 고개를 들어 낭창거리고 다시금 몸을 숙이던 유년의 어느 저편 까막눈 당신은 저물도록 들판을 읽어내려갔다 추운 겨울을 견뎌낸 푸른 쑥이 내 눈물콧물에 버무려지고 있었다 개구리 우는 논두렁을 지나 산 벚꽃 흩날리는 들판을 내달리다 넘어진 어.. 더보기
울음의 내부-검은오름에 들다 / 강해림 울음의 내부 -검은오름에 들다 / 강해림 여자가 운다 삼킨 울음이 울음을 잡아먹는 줄 모르고 뜨겁고 시뻘건 것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북받쳐오는 뭉크덩한 핏덩이같은 것이 울음과 울음이 만나 격렬하게 싸운다 부글부글 끓는다 불기둥이 솟 고, 어떤 것은 소용돌이치면서 흘러가 붕괴했다가는 자멸하는 장곡사 누각에 큰북이 찢어져 구멍 난 채 매달려 있다 얼마나 울었는 지 눈물자국이 빤질빤질하다 꽃이라는 짐승이 모가지 채 뚝뚝 떨어져서는 눈물을 질질 짜는 이 청승 담뱃불을 비벼 끄듯 소소한 감정들도 울대가 붉어졌다 안절부절못하 고 난간 위로 뛰어올라가질 않나 난폭해졌다 울음의 징후를 미처 알아 채지 못한 밤이었지 간밤에 꾼 악몽처럼 눈물 없는 것들, 천박한 웃음들에게 울음이 내쫓 기다 막다른 골목에 퍼질고 앉아 펑펑.. 더보기
날개의 주소 / 임동윤 날개의 주소 / 임동윤 숲이 그리운 것들은 늘 젖어 있다 머리를 덮은 그물망이 걷혀야 비로소 그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서울대공원 철망 우리 속에서 따닥따닥 소리만 낸다 아침이면 강물에 반짝이던 햇살 풀잎마다 고이던 눈빛을 기억한다 물풀 찰랑거리던 소리도 기억한다 그러나 나에겐 햇살이 없다 물수제비로 미끄러지던 실안개도 없다 오직 눈발을 그리워하는 북극곰처럼 그곳을 향해 날아오르지만 그물망에 부딪혀 이내 곤두박질치고 만다 강으로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 상처투성이의 어깨와 흐릿해진 눈 감옥에서 벗어나려고 철망에 몸 부딪치다 끝내 주저앉아버린 나날들 울긋불긋 치장한 발길들이 찾아들면 불안한 소망을 가까스로 펼쳐들고 나는 다시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다 오랜 출산의 기쁨도 잊은 채 다시 하얗게.. 더보기
넙치 / 김경후 넙치 / 김경후 어둑한 보도블록,울툭불툭,넙치 하나,누워 있다,그것은 진흙색 바닥보다 넓적하게,깊게,바닥의 바닥이 되고 있는 중,가끔,이게 아냐,울컥,술 냄새 게운다,뒤척인다,하지만 다시,눌어붙어,바닥이 된다,게슴츠레,왼쪽 눈,위로,울컥,흙탕빛 노을 지나가고,비닐봉지들,키득대는 웃음,지나가고,슬리퍼 끄는 소리,지날 때마다,울컥,그래,나,바닥이라고,소리친다,그것은 더욱 격정적으로 바닥이 되기로 맹세한다,끌로도 끝으로도 떼어 낼 수 없는 바닥,더 바닥,더,더 바닥이 되기로,울컥, 지금 넙치가 나올 철인가,뭐,그렇지,이 바닥이나,저 바닥이나,다 그렇지,사내 둘,바닥 끝 지나 골목 끝,횟집 문을 연다, -계간《시인수첩》2018년 여름호 서울 출생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 더보기
폐기된 어느 저녁 / 이화영 폐기된 어느 저녁 / 이화영 꽃이 온다 저녁이 와도 우리는 흩어져 있었다 식탁에는 아무것도 없고 없는 것보다 많은 식탁보 레이스는 낡은 자세로 공기방울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거실의 사물들이 표정 없이 어두워져간다 사료를 씹는 고양이 소리가 부럼 깨는 소리 같아 의식을 치르듯 무릎을 꿇었다 익명의 첫 문자를 칼질하며 어디로 튈까 망설이는 기울어진 5시 바람이 베란다 창문을 흔들고 깨진 화분조각 흙속에 고양이 발톱이 찍혀있다 지문을 남기는 도발적 메시지를 해독하지 않았다 도화선 같은 불빛이 거리에 흐르면 집들은 대개 비슷하게 행복하거나 조금씩 다르게 불행하다 우유‧마우스‧소주‧삼겹살‧밥공기‧드레싱과 강남역 10번 출구는 같은 맥락이다 치아를 닮은 사탕을 사면서 꿈이 없기를 바랬다 담장 너머 백일홍은 오늘도 답.. 더보기
고등어 자반 / 오영록 고등어 자반 / 오영록 좌판에 진열된 간 고등어 큰놈이 작은놈을 지그시 껴안고 있다 넓은 바다를 헤엄치던 수많은 인연 중에 전생이 부부였던지 죽어서도 한몸이다 부부로 함께 산다는 것이 고행임을 저들은 알고 있는지 겹으로 포개진 팔 지느러미로 고생했다고, 미안하다고 가슴을 보듬고 있다 죽어 이제야 온전히 이룬 부부의 연을 묵묵히 받아내는 모습이다 눈동자엔 푸른 파도가 출렁였지만 배를 열어보니 아내처럼 텅 비어 있다 마지막까지 온전히 보시해야 열반에 드는 것인지 소금사리 와스스 쏟아진다 ―제9회《다시올문학》신인상 당선작 ​ ​ 강원도 횡성 출생 제17회 의정부 전국문학공모전 운문부문 장원 2010년《다시올문학》신인상 수상 2018년《머니투데이》신춘문예(시부문) 당선 시집『묵시적 계약』등 청계천문학상, 숭례문.. 더보기
​길에 대한 단상 / 윤석호 ​길에 대한 단상 / 윤석호 1 맨 처음 길을 간 사람은 길이 아닌 길을 간 것이다 나그네가 외로운 것은 길 때문이다 길은 근원적인 고독 같은 길을 둘이 갈 수는 없다 꿈이란 몸부림치며 한밤에 혼자 꾸는 것이다 그는 그 길로 되돌아왔을까 2 길이 막혔다는 말은 있어도 끝났다는 말은 없다 길이 막히면 길은 그 자리에 잠복한다 비 오는 날 유리창에 떨어진 빗물 머뭇거리지만 스스로 길을 만들며 흘러내린다 길 안에는 또 다른 길들이 내장되어 있다 3 반복되는 길은 길이 아니다 벽에 묶여 평생을 맴도는 시계도 한번 지난 시간은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 몸통을 타 태우고서야 지구를 벗어난 우주선처럼 문을 나선 나에게는 길 뿐이었다 꿈이 길을 만들어내겠지만 때로, 길에 맡기고 가다 보면 어느 날 꿈꾸는 별을 만나게 되리.. 더보기
시계 수리공의 장례식 / 박서영 시계 수리공의 장례식 / 박서영 모든 죽음은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남은 사람들은 시계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흰 벽에 걸린 시계가 물고기처럼 가고 있었다 저 부드러운 지느러미 한 번도 만진 적 없어서 아름다운 지느러미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더 아름다운 지느러미 나는 시계 속의 무량한 구멍으로 당신을 느낀다 장례식에서도 시간의 주유소는 번창하고 있다 울음을 뒤덮고 남은 웃음으로 지폐를 세는 손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뻔뻔함으로 시계를 본다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국밥 한 그릇씩 앞에 놓고 심각하게 앉아있는 시간의 덩어리들 당신은 두려운 이미지만 남긴 채 웃고 있구나 평생 시계 속의 파닥거림에 몰두한 당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고단함으로 몸 안의 건전지를 갈아끼운다 심장을 너무 많이 찌른 바늘이 마음의 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