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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詩

스타바트 마테르 / 진은영 스타바트 마테르 / 진은영 십자가 아래 나의 암소가 울고 있다 오 사랑하는 어머니 울지 마세요 나는 꿈에 못 박혀 아직 살아 있답니다 밤을 향해 돌아서는 내 입술을 당신의 젖은 손가락으로 읽어 보세요 세계는 거대한 푸른 종소리처럼 내 머리 위에서 울리고 있어요 나는 밤의 부속품처럼 어둠 속으로 깊숙이 떨어져 나왔어요 별처럼 순한 당신 눈빛과 네 개의 길고 따뜻한 뱃속을 지나가는 계절들 사이에서도 소화되지 않은 채 나는 남아 있어요 당신은 오래된 술 같아요 내가 마시는 술에 슬픈 찌꺼기가 떠도는 건 내 탓이 아니에요, 어머니 무엇을 마시든 나는 두껍게 취기를 껴입지만 늘 추워요 나를 향해 당신이 동굴처럼 뚫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 팔을 뻗어 서로를 안아요 오 사랑해 서로를 자꾸 끌어당겨요 물에 빠진 사람.. 더보기
지금 격리 중입니다 / 고성만 지금 격리 중입니다 / 고성만 당신을 만나고 온 날 손을 씻습니다 귀를 씻습니다 입을 씻습니다 죄책감을 지우고 기억을 채웁니다 수행기도처도 아닌데 외부인을 일절 출입금지 했습니다 탱자울 가시 세워 스스로 위리안치 한 지 벌써 몇 달 산딸나무 꽃은 피어 뒷마당이 하얗고 들고양이 새끼 낳더니 새 떼가 날아왔습니다 텅 빈 골목 햇살의 날개가 퍼덕거립니다 수평선에 남실남실 물이 차오를 때 고기 잡으러 나간 아버지 서녘하늘 노을 질 때 머릿수건 둘러매고 산밭에 가신 어머니 새둥지 찾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 나는 방파제 넘어 다리 건너 별빛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당신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파도 소리로 가득 채운 방, 비로소 울음이 터집니다 ⸺계간 《시인수첩》 2020년 가을호 전북 부안출생 조선대 국어교육과, 전.. 더보기
덕담 / 도종환 덕담 / 도종환 지난해 첫날 아침에 우리는 희망과 배반에 대해 말했습니다 설레임에 대해서만 말해야 하는데 두려움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오래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느티나무에 쌓이는 아침 까치소리 들었지만 골목길 둔탁하게 밟고 지나가는 불안한 소리에 대해서도 똑같이 귀기울여야 했습니다 새해 첫날 아침 우리는 잠시 많은 것을 덮어두고 푸근하고 편안한 말씀만을 나누어야 하는데 아직은 걱정스런 말들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올해도 새해 첫날 아침 절망과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충남대 문학박사 1984 동인지《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 『접시꽃 당신』 『접시꽃 당신2』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더보기
환생 / 윤제림 환생 / 윤제림 진작에 자목련쯤으로 오시거나 더 기다렸다가 수국이나 백일홍이 되어 오셨으면 금세 당신을 가려냈으련만. 하필 풀꽃으로 오셨어요, 그래. 새벽같이 만나리라 잠도 못 이루고요, 눈뜨자 풀숲으로 내달았는데요. 그렇게 이른 시간에 우리말고 누가 더 있으랴 싶었는데요. 목을 빼고 손짓하시겠거니, 슬렁슬렁 풀섶을 헤집는데요, 아 이런…… 온 산의 풀이란 풀들이 죄다 고개를 쳐들고 사람 찾는 낯이 되지 뭐여요. 이를테면 금낭화, 맥문동, 애기똥풀. 요다음엔 이름이나 일러주세요. 알고 간대도 이름과 얼굴이 따로 놀아서 오늘처럼 허탕만 치고 오겠지요만. 1960년 충북 제천 출생, 인천에서 성장. 1987년 더보기
조화 / 이명윤 조화 / 이명윤 이화공원 묘지에 도착하니 기억은 비로소 선명한 색채를 띤다 고왔던 당신, 묘비 옆 화병에 오색 이미지로 피어 있다 계절은 죽음 앞에서 얼마나 공손한지 작년 가을에 뿌린 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울며불며한 날들은 어느새 잎이 지고 죽음만이 우두커니 피어 있는 시간, 우리는 일렬로 서서 조화를 새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술을 따르고 절을 하는 도중에 어린 조카가 한쪽으로 치워둔 꽃을 만지작거린다 죽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한 거다 세월을 뒤집어썼지만 여전히 부릅뜬 웃음을 본다 우리는 모처럼 만났지만 습관처럼 갈 길이 바빴다 서로의 표정에 대해 몇 마디 안부를 던지고 떠나는 길 도로 건너편 허리 굽은 노파가 죽음 한 송이를 오천 원에 팔고 있다 차창 너머로 마주친 마른 과메기의 눈빛 삶이 죽.. 더보기
생활사 / 신용목 생활사 / 신용목 ​ 지금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 물 끓는 소리에서 피어나는 물방울처럼 창문 너머 공터에는 단독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책장으로 가 시집을 펼치고 ‘라일락’이라는 글자 속에서 라일락 향기를 찾는다 지금 사라지는 것이 있다 텔레비전을 켜면 사랑해요, 고백은 영원히 죽지 않아서 사람이라는 숙주를 갈아타고 갈아타고 사랑해요, 지금쯤 저 배우는 퇴근했겠지 고백으로부터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 수없이 지나간 일요일이 덩그렇게 남겨놓은 오후 아파트에 살면서 갖다 놓은 화분 17층 공중의 작은 땅 달 나는 먹구름으로 다가가 비를 뿌린다 나의 블랙홀, 아파트가 끝나는 자리 대출 상환이 끝나는 자리 생활이 끝나는 자리 ​ 지금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 010번 마을버스는 어떻게 읽어야 하나 0으로 시.. 더보기
아쿠아리움 / 김이듬 아쿠아리움 / 김이듬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나는 생각한다 실연한 사람에게 권할 책으로 뭐가 있을까 그가 푸른 바다거북이 곁에서 읽을 책을 달라고 했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웃고 오늘처럼 돈이 필요한 날에도 나는 참는 동물이기 때문에 대형어류를 키우는 일이 직업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쳐다본다 최근에 그는 사람을 잃었다고 말한다 죽음을 앞둔 상어와 흑가오리에게 먹이를 주다가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아무런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내가 헤엄치는 것을 논다고 말하며 손가락질한다 해저터널로 들어온 아이들도 죽음을 앞둔 어른처럼 돈을 안다 유리벽을 두드리며 나를 깨운다 나는 산호 사이를 헤엄쳐 주다가 모래 비탈면에 누워 사색한다 나는 몸통이 가는 편이고 무리 짓지 않는다 사라.. 더보기
흘림체 / 유종인 흘림체 / 유종인 ​ ​ 눈꺼풀 내리면 깜박 저녁이 밤으로 머릴 디밀 것 같은 때 아까워라 도로 아까워서 저녁 하늘을 보느니 ​ 저 눈썹이 짙어진 하늘 가에 기러기 떼인가 청둥오리 떼인가 멀고 어둑해서 어느 것이어도 틀리지 않는 새 떼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채찍처럼 제 무리를 휘갈겨 간다 ​ 어디 한 번 내 허리에 아주 헐렁하게 감아 보고도 싶은 흘림체의 허리띠가 조였다 풀었다 내둘렀다 감았다 으늑한 운필(運筆)이 낙락한데 ​ 저 반가운 울음이 섞인 흘림체가 번지듯 내려앉은 곳, ​ 거기 들판이나 샛강 가에 가며는 등 따신 햇빛을 쬐며 부리로 땅에 점자(點字)할 새 떼들, 그 흘림체가 모이 쪼는 곁에 나는 바람의 먹〔墨〕을 가는 나무로나 서 있을까 무엇을 쓰든 사랑의 허기를 면하는 길로 발길이 번지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