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詩 썸네일형 리스트형 뱀의 입속을 걸었다 / 고 영 뱀의 입속을 걸었다 / 고 영 뱀이 쓸쓸히 기어간 산길 저녁을 혼자 걸었다 네가 구부러뜨리고 떠난 길 뱀 한 마리가 네 뒤를 따라간 길 뱀이 흘린 길 처음과 끝이 같은 길 입구만 있고 출구가 없는 길 너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 너의 입속을 걸었다 뱀의 입속을 걸었다 ㅡ계간 《시인시대》(2021, 여름호) 1966년 경기도 안양 출생, 2003년 《현대시》 신인상 등단, 2004, 2008 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기금 받음, 시집『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딸꾹질의사이학』, 현재 《시인동네》발행인 길고 멀었던 옛적 산길이 떠올랐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바로 도착 지점이 저만큼 또 모퉁이 를 달고 서 있어서 걸어가는 내내 무척이나 싫었던 기억이 난다. 돌아오는 길은 밤의 터널 이어서 쫓기는 .. 더보기 자두의 시간 / 마경덕 자두의 시간 / 마경덕 뒤뜰에 버려진 자두나무 흩어진 봄을 뭉쳐 서너 개 열매를 품었다 누군가 걷어차던 차디찬 밑동 봄볕에 데워 늦둥이를 얻었는데 둥지를 노리는 뱀처럼 바람이 가지를 타고 오른다 새파랗게 뒤집히는 이파리들 얼핏얼핏 드러난 얼굴들 잎사귀에 싸매둔 어린것, 바람의 혀가 닿는 순간 늙은 자두나무 뒷목이 뻣뻣해진다 자두의 심장이 채 붉기도 전에 바람은 왜 찾아오는 것일까 자두 한 알 아찔한 바닥으로 고꾸라질 때 질끈 눈을 감았는지, 주워든 손에 설익은 피가 묻는다 나무에게도 아픈 손가락이 있다 허전한 나뭇가지 어디쯤 빈자리 하나가 있을 것이다 『시와정신』2020. 가을호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신발론』 『글러브 중독자』 『사물의 입』 등 여름 중간 쯤이던가? 붉은.. 더보기 홍어 / 박 일 홍어 / 박 일 금암다방 레지는 표정없이 말을 이어갔어 신안 어디께서 무작정 가출했다고 했어 첨엔 홀가분한 기분이었다고 했어 사나흘 버스터미널에서 뻐팅기다가 그럴싸한 사내를 발견했다고 했어 환호작약 입질은 단 한번으로 끝났다고 했어 비릿한 살냄새 뿌리며 매일 발버둥쳤으나 그 때마다 바늘은 폐부 깊숙히 찔러왔다고 했어 세상이 온통 걸낚* 입고 있던 미니스커트가 유일한 밥이었다고도 했어 차분한 어조로 마치는가 싶더니 전화를 받고 덜삭은 웃음을 보자기에 싸서 서둘러 나갔어 거리엔 버즘같은 긴 겨울 물러나고 입춘이 막 걸음마를 떼고 있었어 * 주낙과 비슷한 형태이지만 미끼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특징 2006년 《시사사》 등단, 시집 『난』 등 홍어를 처음 맛보았을 때가 이런 맛이었던가? 시의 행간에서 짙은 암모.. 더보기 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 김종해 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 김종해 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까 나의 동무들은 모두 떠나고 나 혼자 남아 있다 외로우니까 추억이 그 자리를 넓힌다 내 안에서 인기척을 내는 것은 무인도뿐이다 저혼자 바위가 되거나 바람이 되는 것이다 하루치의 미세량! 무인도에선 그리운 사람의 이름만 파도소리를 내고 있다. **김종해 시집 [풀]에서** 김종해(金鍾海, 1941년~ ) 부산에서 출생. 1963년 《자유문학》 신인상에 당선《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시협회상 수상문학세계사 창립 대표를 역임시집으로 《인간의 악기(樂惡)》 (1966), 《신의 열쇠》,《왜 아니 오시나요》,《풀》《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등, 시선집 《무인도를 위하여》를 간행 나이가 들어.. 더보기 영역(領域) / 김유석 영역(領域) / 김유석 줄이 풀리자 득달같이 문간으로 달려간 그는 찔끔찔끔 오줌을 지려댄다. 오랫동안 응시했던 곳, 마당 구석이나 뒤울안 자주 귀를 부스럭거리게 하던 곳을 발톱으로 긁어가며 가장 원초적인 저의 냄새를 묻힌다. 눈길이 닿지 않는 곳 먼 소리가 오는 곳까지 미치는 줄 알았다.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성가시게 해온 줄 알았으나 그를 묶어놓은 것은 겨우 그의 똥오줌 냄새가 뻗히는 곳 찌그러진 밥그릇이 보이는 그 안을 쫑긋거리고 짖어댔던 것이다. 물어뜯을 듯 당기던 앙칼진 사슬은 느슨해지는 그 주변을 경계하는 거였는데 묶어야만 보이고 들릳던 것들 줄과 함께 사라지고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하고많은 밖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홀연 묶였던 자리 꼬리만을 남겨둔 채 그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전북 김.. 더보기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 박노해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 박노해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멀어져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 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 나는 내 삶을 지나쳐 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박노해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에서 1957년 전라남도 함평 출생 1983년 《시와경제》 등단 시집 『노동의 새벽』 『겨울이 꽃핀다』 『참된 시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사진 에세이 『라 광야 - 빛.. 더보기 거울 / 이정란 거울 / 이정란 너는 나를 순례하지 않았는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그래 마음인가 같은 동심원에 묶인 너와 나 황홀이다 너를 보면서 완전한 반쪽이 되어간다 뒤돌아서면 안 보이는 등 검은 옷 한 벌을 우린 함께 입었다 암암한 반쪽을 비추기 위해 하나가 될 수 없는 반쪽 나는 너의 침묵이 아니라서 너는 나의 입김이 아니라서 마주볼 때마다 들키는 사이로구나 나를 떠나면 너에게 너를 떠나면 나에게 도착하는 반쪽짜리 행로 오른손을 올려, 그렇지 너의 심장 악몽을 던져, 이런 나의 아침이 무너졌구나 너의 꽃나무를 빌릴 수밖에 등을 돌리기 전에 꽃잎 그래 어깨를 맞대보자 직각 완벽한 타인을 이루는 구조 바람의 기억을 나눠 가지면 수평 어색하고 어설프고 하나 되는 순간 들리지 않는 음을 노래할 수도 있다 검은 옷을 벗어.. 더보기 잉여의 시간 / 나희덕 잉여의 시간 / 나희덕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더보기 이전 1 2 3 4 5 6 7 8 ···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