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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詩

뿌리의 방식 / 박종인 뿌리의 방식 / 박종인 죽은 듯이 앙상한 나무가 날씨의 위로를 받자 부스스 눈을 뜨기 시작했다 봄볕 한 사발로 메마른 입술에 생기가 돌았다 이것은 가능성이다 예상은 빗나가거나 적중한다 절반이 확률을 넘었을 때 봄이다 잘려진 목을 접목하는 기술자들, 전문가의 손이 빛나는 철이다 무르익어 번창한 시기는 봄의 중년, 중년은 녹음과 그늘로 이어진다 봄의 뿌리에서 출발한 계절의 마디들, 네 개의 뿌리는 네 개의 매듭을 지닌다 되풀이되는 기술에 나이테가 그려진다 봄의 고리에 들러붙은 수많은 죽음들, 한 번의 죽음 위에 안간힘이 다녀가고 바람의 피가 서늘해진다 그늘을 좇아 모여든 것들은 그늘의 변심으로 다시 흩어지고 부활을 꿈꾸는 가능성은 어둠 속에 웅크린다 ⸺시집 『연극무대』 2020년 9월 전북 무주 출생 201.. 더보기
오직, 바람 / 김 산 오직, 바람 / 김 산 고추와 상추와 딸기와 방울토마토 모종을 심었다 해바라기와 케일과 샐비어 씨앗도 뿌렸다 매일같이 조리개로 한가득 물을 주고 퇴비도 주고 잡초도 솎아주었다 양껏 물을 머금은 식물들은 하루가 다르게 키가 자랐고 가지를 자르고 지주대를 박자 줄기들이 꼿꼿하게 올라왔다 중심을 잡아줘야 열매가 맺힐 거라 생각을 했다 문득, 중심이 사라져야 바람이 춤을 출 거란 생각을 했다 지주대를 뽑아버리자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휘청거리던 식물들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비스듬히 무너지면서 오롯해지고 있었다 심지도 뿌리지도 않은 민들레 한 송이가 화단 모서리 콘크리트를 비집고 칠렐레팔렐레 춤을 추고 있었다 빛도 물도 흙도 없이 바람만으로 온 세계를 뒤흔들고 있었다 ⸻계간 《시사사》 2020년 여름호 1976년 충.. 더보기
또 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또 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1950 경상남도 하동에서 출생,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로 당선,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로 당선.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로 당선. 1979년 첫시집 ​《슬픔이기쁨에게》를 출간. 이후 시집 《서울의 예수》(1982)와 《새벽편지》(1.. 더보기
흔적 / 서정윤 흔적 / 서정윤 밤을 꼬박 세워 바람 소리를 들었어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면 나머지 슬픔들도 곧 도착할 거라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어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말해 주지 않은 채 자신의 일들로 바빴어 반짝이는 나뭇잎에 다가가 말을 걸어도 햇볕이 필요하다는 대답뿐 내가 왜 우울한지는 묻지도 않았어 모든 변하는 것들 속에서 서서히 옅어지는 기억들 잊혀지는 게 싫어 창을 열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어 있었어 절대로 변하지 않는 건 없다고 인정해도, 숨겨진 연결 고리 하나라도 있었으면, 원했지 영원히 나만 알고 있을 비밀들로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 가장 힘든 걸 말해 버리라고 자꾸 유혹하지만 그럴 만한 용기도 없어 나에게 남은 너의 흔적을 이젠 남김없이 가져갔으면 좋겠어 1957년 대구에서 출생. 영남대학교 대학원.. 더보기
식민지- 허난설헌이 프리다 칼로에게 / 허영숙 식민지 - 허난설헌이 프리다 칼로에게 / 허영숙 당신은 몸의, 나는 관습의 식민지 젖은 붓의 행간을 당기고 밀며 밤을 산맥처럼 넘어갈 때 당신은 거울의 당신을 보며 화폭을 적시고 꽃의 얼굴로 먼 바깥을 보고자 한 심사가 금기를 넘어 선동의 죄목으로 가두는 것이 관습이라 감기처럼 잦은 당신의 불운이 운명의 감옥이라 망명할 수 없는 투사처럼 싸울 수도 없는 현실에 귀를 붙이고 눈을 잠그고 마음으로만 웅숭한 깊이를 가진다 당신이나 나나 시절과 운명의 식민지 아래 오래 울다가는 사람 당신이 우산을 가지러 가지 않았더라면 꽃이 비로소 꽃인 시절에 내가 왔더라면 우리도 기념일을 가졌을까 *프리다 칼로 - 자신의 고통스러운 생을 강렬하고 충격적으로 그려 냄으로써 관능적이고 개성 강한 자의식의 세계를 창조한 멕시코 출.. 더보기
깡통 / 김유석 깡통 / 김유석 툭, 차버리고 싶은 감정과 툭 차이는 감정 중 소리를 내는 것은 어느 쪽일까 채워지기 전과 채웠다 비워낸 공간 가운데 어느 편이 더 시끄러울까 통과 깡통의 차이, 깡통을 차다와 깡통 차다 사이 만들어질 때 미리 담긴 소음인지 비워진 후의 울림인지 깡 찬 소리가 난다 몇 배 새끼를 빼낸 뒤 뱃가죽 축 늘어진 늙은 돼지를 이르기도 하는 속된 말, 깡통이 뭐길래 깡통을 보면 차고 싶어지나 그 속에서 뭐가 튀어 나와 참새들을 화들짝 놀라게 하나 깡통을 깡통으로만 아는 순 깡통들, 납작하게 눌러 밟아버리면 차라리 나을 건데 톡, 톡, 누군가 자꾸 나를 걷어차기만 한다 전북 김제 출생,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 선,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 더보기
국화 앞에서 / 김재진 국화 앞에서 / 김재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 귀밑에 아직 솜털 보송보송하거나 인생을 살았어도 헛 살아버린 마음에 낀 비계 덜어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이라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 꽃이라도 다 같은 꽃은 아니다. ​눈부신 젊음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국화는 드러나는 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꽃이다. ​느끼는 꽃이 아니라 생각하는 꽃이다. ​꺾고 싶은 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꽃이다. ​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가을날 국화 앞에 서 보면 안다. ​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굴욕을 필요로 하는가를. ​어쩌면 삶이란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는 것인지 모른다. ​어디까지 끌고 가야할지 모를 인생을 끌고 묵묵히 견디어내는 것인지.. 더보기
페인트 공 / 성영희 페인트 공 / 성영희 그에게 깨끗한 옷이란 없다 한 가닥 밧줄을 뽑으며 사는 사내 거미처럼 외벽에 붙어 어느 날은 창과 벽을 묻혀오고 또 어떤 날은 흘러내리는 지붕을 묻혀 돌아온다 사다리를 오르거나 밧줄을 타거나 한결같이 허공에 뜬 얼룩진 옷 얼마나 더 흘러내려야 저 절벽 꼭대기에 깃발 하나 꽂을 수 있나 저것은 공중에 찍힌 데칼코마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작업복이다 저렇게 화려한 옷이 일상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 거미가 정글을 탈출할 때 죽음에 쓸 밑줄까지 품고 나오듯 공중을 거쳐 안착한 거미들의 거푸집 하루 열두 번씩 변한다는 카멜레온도 마지막엔 제 색깔을 찾는다는데 하나의 직업과 함께 끝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내려온 벽면에는 푸른 싹이 자라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