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詩 썸네일형 리스트형 수선집 근처 / 전다형 수선집 근처 / 전다형 의수족 아저씨는 십 수년 째 주일만 빼고 수선 일을 했네 나는 팔 부러진 우산을 들고 찾아갔네 허름한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단골집 돌아서다 어둠 속 우두커니 서 있는 입간판에게 물었네 수척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네 꺾어진 골목으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 영문을 모르는 바람이 틈새를 드나들고 있었네 맞은편 산뜻한 수선집 미싱 요란하게 푸른 하늘을 박고 있었네 찾아준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 헛걸음하게 해 죄송합니다 삐뚤한 글씨체가 손잡이 근처 붙어 있었네 나는 발길을 돌려 건널목에 섰네 의수족 아저씨가 손때 묻은 연장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네 누가 맡겼다 찾아가지 않은 낡은 가방에 망치, 칼, 가위, 쓰다 남은 실, 지퍼, 우산대 몇 땅으로 기우는 어깨 위에서 강물소리가 들렸.. 더보기 레밍의 날들 / 이건청 레밍의 날들 / 이건청 떠돌이 쥐 레밍 떼가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걸 본 적이 있다 TV 화면이었는데 들판을 떼 지어 달려온 것들이 벼랑 아래 바다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풍덩 풍덩 뛰어내리는 것들 뒤에 뛰어내려야 할 것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툰드라에 굴을 파고 나뭇잎이나 새싹, 줄기, 뿌리들 잘라 먹고 살던 것들이 자꾸 자꾸 새끼를 길러내서 들판을 그득 채울 때가 되면 다른 들판을 찾아 떠난다는데 키가 작고 다리가 짧아서 들판도 하늘도 보지 못한 채 앞장 선 것들만 일심으로 따라 가다가 벼랑을 만나 풍덩 풍덩 덜어져 죽는데 멈출 곳에서 멈추지 모한 것들이 돌아서야 할 곳에 돌아서지 못한 것들이 앞선 것들의 뒤만 쫓아가다가 풍덩풍덩 벼랑으로 밀려 떨어져 내린다는데. 1942년 경기도 이천 출생. 1970년 《.. 더보기 옥(屋) -소나무 / 윤제림 옥(屋) -소나무 / 윤제림 천금을 준대도 치마끈 한번 풀어본 적 없었네 데고 찢고 그슬리고 할퀴어 멍 천지 육신 피딱지 누더기를 감았어도 무명씨 억만세 뇌이며 살았네 살 저며 보리고개 죽조반 내고 눈물범벅 송화떡으로 꽃입술 주고 어둔 밤엔 팔목 꺾어 광솔불로 일어나 춤추었네 성한 목숨도 징징 오그라드는 이 삼동에 그 몸으로 그 몸으로 상기도 소리하네 부지깽이 같은 목으로 화젓가락 같은 울음을 우네 청산옥 그 여자 1960년 충북 제천 출생, 인천에서 성장. 1987년 더보기 젓가락 / 최정신 젓가락 / 최정신 너와 내가 마음이 상해 토라졌을 때도 직립의 막대기로 하나였지 우리가 둘이 하나였기에 핏속에 녹아드는 마음을 알았고 혼자서는 아물지 않던 상처도 만조가 쓸고 간 뻘밭처럼 치유할 수 있었지 우리가 되었다는 건 온몸에 물관을 칭칭 감고 숨과 숨을 기대 맑은 물 받아먹고 살던 어느 숲 솔밭 산에서 서로에게 업이 있었을 테지 또 한 생, 연이 닿아 외로움을 기대며 동행할 수 있다는 건 다행한 축복이지 철없던 푸름은 가고 싸늘해진 등을 기대 함께할 숙주가 되었지만 어쩌면 우리, 살아서 함께한 날보단 더 긴 날을 함께할지 모르지 않냐고 경기도 파주 출생, 신인상 수상, 동인 시집 『구상나무에게 듣다』, 동인시집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느티나무의 엽서를 받다』, 『동감』등 오랜만에 열어본 .. 더보기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 더보기 수배전단을 보고 / 윤성택 수배전단을 보고 / 윤성택 귀갓길에 현상수배 벽보를 보았다 얼마나 많은 곳에 그의 자유를 알려야 하는지 붉은 글씨로 잘못 든 生의 내력이 적혀 있다 어쩌다 저리 유명해진 삶을 지켜 봐달라는 것일까 어떤 부릅뜬 눈은 생경한 이곳의 나를 노려보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이름 석자로 수배중이다 납부 마감일로 독촉되는 고지서로 열자리 숫자로 배포된 전화번호로 포위망을 좁혀오는지도 모른다 칸 속의 얼굴은 하나 둘 붉은 동그라미로 검거되어 가는데, 나를 수배한 것들은 어디서 잠복중일까 무덤으로 연행되는 남은 날들, 그 어딘가 잡히지 않는 희망을 일망타진할 때까지 나는 매일 은신처로 귀가하는 것이다.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에 시 “수배전단을 보고”외 두편으로 등단. 2015년 올해의 젊은 .. 더보기 하모니카를 잃어버렸네 / 김재진 하모니카를 잃어버렸네 / 김재진 돌이켜보면 모두 사라져버렸네. 밤새워 이야기하던 친구도 영화 속의 주인공을 찾아 헤매던 발길도 지워져버렸네 십 년만에 만난 사람 앞에서도 무덤덤한, 잠깐의 반가움이 지나고 나면 시들해지는, 망각만이 유일한 나 저기 건물의 유리에 비친 나 또한 내가 아니네. 퀭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저 사내는 도대체 나일 수 없네. 황망히 바퀴 굴려 알 수 없는 복잡함 속으로 떠나는 저 자동차들만이 내가 있는 곳을 안다고 하네. 읽었던 한 권의 책 머리를 들끓게 하던 한때의 이념 열렬했던 사랑마저 내가 아니네. 하숙집 벽 위에 붙여놓았던 몇 줄의 잠언 속에도 나는 없네. 정말 하모니카를 잃어버렸네. 김재진 시인, 소설가, 1955년 대구 출생, 계명대학교,1976년 영남일보.. 더보기 오, 헨리의 편지 / 허영숙 오, 헨리의 편지 / 허영숙 우체부도 없이 저 편지들 어떻게 여기로 왔을까요. 다 읽기도 전에 또 쌓이는 편지에는 붉은 곡절만 가득합니다. 어제는 어둑신한 틈을 타고 누가 잎들을 모조리 뜯어가는 소리 들었습니다 스스로 버려야 할 때라는 것을 ,저 잎 보내지 않고서는 다시 여기 올 수 없다는 것을 바람도 안 까닭이겠지요. 일생이란 잠시 극적으로 머물다 지나가는 단편 같은 것인지요. 푸른 날의 비명조차 조용히 묻어야 하는 순간이 왔다는 전언에 자잘한 슬픔이 북받쳐 올라 마음이 자꾸만 안쪽으로 밀립니다. 한 잎의 간절함이 사람을 살리고, 상하게 해도 한 우주를 내어주어야 또 살 수 있으므로 붓으로 억지로 그릴 수 있는 목숨은 없다는 것, 억지로 풀어낼 어설픈 반전도 여기서는 쓸 수 없는 작법일 뿐 이라는 것,.. 더보기 이전 1 ··· 6 7 8 9 10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