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詩 썸네일형 리스트형 기다림 근처 / 양현근 기다림 근처 / 양현근 밤늦은 시간 버스정류장에서 취객 몇이 비틀거리는 방향을 서로 가누고 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버스는 올 것인지 기다리는 버스는 대체 오기나 할 것인지 알려주거나 물어오는 이도 없고 누군가는 기다림을 접고 정류장을 빠져나가고 또 누군가는 무작정 기다린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환한 이마, 누군가의 서툰 기별이 사뭇 그립기도 한 시간 발을 헛디딘 활엽들이 사그락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불빛을 세우기 위해 차도로 내려선다 목을 길게 늘려도 계절은 아직 제 자리 한 계절 돌아와도 다시 제 자리 한때 누군가가 그토록 간절했던 시간들 환했던 우리들의 스물이거나 서른하고도 몇이거나 이제는 모두 서둘러 떠나간 정류장에서 세상과 불화한 담배꽁초만 수북하니 뒹구는데 맨발로 서있던 기다림의 근처 바퀴 울음소.. 더보기 어떤 눈 / 류시화 어떤 눈 / 류시화 분명히 이곳에 어떤 눈이 하나 있었다 나무들 사이에 양떼구름들 속에 기억나지 않는가, 기억해 보렴 분명히 너는 이곳을 지나갔었다, 그때 어떤 눈이 너의 삶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다, 분명히 이 저녁 안개 속에서 너의 삶이 천천히 흘러갔었다 그때 무엇인가 이곳에 있었다 저 뒤에 저 뒤켠에서 너를, 너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가, 기억해 보렴 그때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생각들이 너의 머리를 사로잡고 있었다 너는 일찍이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아니, 모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네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저곳에서 새의 눈이 저 나무 꼭대기 위에서 너를, 너의 눈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눈이 *본명 : 안재찬. *1959년 출생. 충북 옥천군 *경희대학 교 국문과 졸업... 더보기 숨어 사는 영혼처럼 / 강인한 숨어 사는 영혼처럼 / 강인한 외딴 섬으로 가는 다리였다. 버스는 오 분쯤 달려 섬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널 때 창밖으로 바다가 아득하였다. 파랗게 보이는 높고 소슬한 하늘, 아래에 어두운 보랏빛, 그 아래 먹구름과 양털구름이 뒤섞이고. 청동의 파도주름과 맑은 햇빛, 색색의 구름들, 높은 데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사이사이 구름을 뚫고 단숨에 꽂히는 바닥은 은빛 바다였다. 햇빛을 줄기줄기 온몸에 받아 적는 보얀 구름 커튼에 잡티 하나. 차창에 묻은 티끌일까 손가락으로 헤집는다. 점점 키워보니 아뜩한 하늘에 아, 숨어 사는 영혼처럼 혼자 날고 있는 새였다. ⸻격월간 《현대시학》 2019년 3-4월호 1944년 전북 정읍 출생, 전북대학교 국문과 졸업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집으로 『이상 기후』 .. 더보기 화살 / 김기택 화살 / 김기택 과녁에 박힌 화살이 꼬리를 흔들고 있다 찬 두부 속을 파고 들어가는 뜨거운 미꾸라지처럼 머리통을 과녁판에 묻고 온몸을 흔들고 있다 여전히 멈추지 않은 속도로 나무판 두께를 밀고 있다 과녁을 뚫고 날아가려고 꼬리가 몸통을 밀고 있다 더 나아가지 않는 속도를 나무 속에 욱여넣고 있다 긴 포물선의 길을 깜깜한 나무 속에 들이붓고 있다 속도는 흐르고 흘러 녹이 다 슬었는데 과녁판에는 아직도 화살이 퍼덕거려서 출렁이는 파문이 나이테를 밀며 퍼져나가고 있다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1989년 신춘문예 시 당선. 김수영문학상, 현대 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 『소』『껌』『갈라진다 갈라진다』『울음소리만 놔두고 .. 더보기 복숭아뼈 / 최금진 복숭아뼈 / 최금진 복숭아꽃 피던 시절 도시락을 싸서 너와 소풍 가던 기억 단단하다 너와 먹던 복숭아 조각이 어떻게 발목까지 내려가 복숭아뼈 화석이 되었을까 나는 너의 발뒤꿈치를 가만히 물었다 노리기 좋은 희디흰 발목이었으니까 달콤한 독 잔뜩 오른 독사가 되어 우리가 나뭇가지에 물컹물컹한 몸을 쪼개어 열려 거꾸로 익어갈 때 너무 오래 걸어와 돌아가는 길을 잊은 한 사람은 기꺼이 그 과실을 따먹었으니 너의 발목에 족쇄처럼 사랑은 자취를 남겼나니 복숭아뼈엔 복숭아 먹던 흔적이 있어서 네 희고 향긋한 발목을 보면 죄는 익어가고 아름다운 기억은 이렇게 모든 여정을 걸어와 발목에 모여 고였나니 그 굳어버린 호수의 뼈여, 둥근 바닥이여 복숭아꽃 피는 시절에 우리는 한 나무에 달려 우리의 유방과 엉덩이와 발그레한 얼.. 더보기 쌀나방 / 박성우 쌀나방 / 박성우 그냥 쌀이 아니라고 했다 아내는 어디선가 십 킬로짜리와 이십 킬로짜리 쌀을 두 포대나 배달시켰다 일체 약도 안 하고 키워서 몸에도 좋고 밥맛도 좋을 거라는 아내의 말은 맞았다 수수와 조를 섞어 지은 밥은 여간 맛이 좋은 게 아니어서 쌀 한 포대를 금방 비웠다 한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한동안 사라졌던 나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두 번째로 개봉해 먹고 있던 쌀을 휘저으며 살펴보니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쌀나방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무농약 쌀이 맞긴 맞나보네, 내 검지를 타고 오른 쌀나방은 식탁 쪽으로 씩씩하게 날아오르며 아무런 해가 없는 좋은 쌀이라는 걸 몸소 증명해 보여주기까지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문득 나는 나방을 먹고 사는 작은 새 한.. 더보기 예감 / 김사이 예감 / 김사이 낮술에 취한 남자씨들이 비틀거린다 인도를 장악하고 갈지자로 걸어온다 느닷없이 달려드는 일상의 예감들 차도로 내려설까 뛸까 망설이다가 눈이 부딪쳤다 그들과 교차하는 순간 풀린 눈으로 피식거리며 팔을 쭉 뻗는다 가슴을 팍 치고 간다 화가 나서 가방으로 내려치려니 키득거리면서 술집으로 들어간다 허공에 머물다 툭 떨어지는 가방 한참을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쫓아가서 싸울 용기까지는 내지 못한다 두려움은 내 몫이다 뒤통수로 그들의 웃음을 읽으며 주저앉았다 몇날 며칠 끙끙거리며 나를 달랜다 명백한 고의였으나 술에 취했으니 너그럽게 잊어주는 것도 내 몫이다 아무 이유가 없는 상식적인 날이다 -김사이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창비, 2018)에서 1971년 전남 해남 출생 호남.. 더보기 골목을 수배합니다 / 최정신 골목을 수배합니다 / 최정신 처음 걸음마를 떼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가르쳐 준 골목이었어요 밥 짓는 냄새가 그윽한 굴뚝이 구름을 복사하고 모퉁이마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내려다보던 전봇대가 온갖 바깥소식을 전하고 찹쌀떡, 메밀묵이 야경을 돌고 채송화, 분꽃, 과꽃, 코스모스가 계절을 데려다 주었어요 고무줄놀이로 근육을 키웠고 땅따먹기로 보폭을 키우기도 했어요 담 밑에 기대 서러움도 달랬고 첫사랑을 빙자해 입술도 훔쳐 갔어요 처마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된장찌개 냄새를 날리며 이마를 맞댄 창가에 구절양장 낭만이 깜박이던 백열등 따스한 불빛은 어디쯤 있을까요 주차금지 팻말에 서정을 빼앗긴 골목 어느 날 굴착기란 괴물이 들이닥쳐 골목이란 골목은 죄다 부수고 박살을 냈어요 골목에서 은혜를 입은 아이들이 자본주의 .. 더보기 이전 1 ··· 3 4 5 6 7 8 9 ···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