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詩 썸네일형 리스트형 인디고 / 박은영 인디고 / 박은영 빈티지 구제옷 가게, 물 빠진 청바지들이 행거에 걸려 있다 목숨보다 질긴 허물들 한때, 저 하의 속에는 살 연한 애벌레가 살았다 세상 모든 얼룩은 블루보다 옅은 색 짙푸른 배경을 가진 외침은 닳지 않았다 통 좁은 골목에서 걷어차이고 뒹굴고 밟힐 때면 멍드는 건 속살이었다 사랑과 명예와 이름을 잃고 돌아서던 밤과 태양을 좇아도 밝아오지 않던 정의와 기장이 길어 끌려가던 울분의 새벽을 블루 안쪽으로 감추고 질기게 버텨낸 것이다 인디고는 인내와 견디고의 합성어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애벌레들은 청춘의 옷을 벗어야 한다 질긴 허물을 찢고 맨살을 드러내는 각선의 방식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대생들이 세상을 물들이며 흘러가는 저녁의 밑단 빈티지가게는 어둠을 늘려 찢어진 역사를 수선하고 물 빠진 허.. 더보기 비에게 쓰다 / 윤성택 시인 비에게 쓰다 / 윤성택 시인 버스는 아가미를 열고 우산 몇을 띄워놓네 다음 정차역까지 단숨에 가려는 듯 바퀴마다 지느러미 같은 물길이 돋네 수초처럼 흔들리는 이정표는 번들거리며 흘러가네 밤은 네온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고, 푸르다가 붉다가 점멸하는 자음만으로 도시를 읽네 건너편 창을 훑고 내려오는 자동차 불빛 밀물처럼 모서리에서 부서지네 물소리가 밤새 저리 뒤척이며 경적을 건져낼 것이네 한 떼의 은빛 치어가 가로등으로 몰려가네 살 오른 빗방울이 창문으로 수없이 입질을 해오지만 내가 던진 찌는 아무것도 물어오지 않네 이렇게 막막한 밤이면 그립다든가 보고 싶다든가, 쓸쓸한 표류를 어쩌지 못하네 무엇이든 깊어지기 시작하면 그렇게 일순간 떠오르는 것 흐르는 생각 끝에 맨홀이 역류하네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더보기 멸치똥 / 복효근 멸치똥 / 복효근 똥이라 부르지 말자 그 넓은 바다에서 집채만한 고래와 상어와 때깔도 좋은 열대어들 사이에서 주눅들어 이리저리 눈치보며 똥 빠지게 피해다녔으니 똥인들 남아 있겠느냐 게다가 그물에 걸리어 세상 버릴 적에 똥마저 버렸을 터이니 못처럼 짧게 야윈 몸속에 박힌 이것을 똥이라 하지 말자 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잡아먹은 적 없이 잡아먹혀서 어느 목숨에 빚진 적도 없으니 똥이라 해서 구리겠느냐 국물 우려낼 땐 이것을 발라내지도 않고 통째로 물에 넣으면서 멸치도 생선이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적마다 까맣게 타들어갔을 목숨 가진 것의 배알이다 배알도 없는 놈이라면 그 똥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들어낸 자리 길고 가느다란 한 줄기 뼈가 있겠느냐 밸도 없이 배알도 없이 속도 창시도 없이 똥만 그득한 세상을.. 더보기 날개를 믿어 봐 / 서정윤 날개를 믿어 봐 / 서정윤 사랑은 좋은 거야 하지만 너무 어려워 아직도 완성되어지지 않은 사랑 두렵지만 직접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서 도망가지 마 억세고 거친 바람에 적응하는 새처럼 자신의 날개를 믿어 봐 어느 순간 스스로의 혼란에 빠져 추락할지라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용기만 있다면 우리의 신성한 약속 사랑이 깊어지는 건 가꾸기 때문이야 오늘 밤의 탈출구를 찾아 이대로 계속 가면 어떻게 될지 나는 알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에게 요구하지 마 넌 지금 너무 예민해져 있어 함께 뭔가를 이루려는 노력은 좋은 거야 서로의 가슴을 느끼게 해 천천히 나에게 다가와 너를 위해 꾸민 일이 있어 내가 마련한 새로운 날개로 날아 봐, 이 찬란한 하늘을 1957년 대구에서 출생. 영남대학교 대학원 국어.. 더보기 엉겅퀴풀에게 노래함 / 류시화 엉겅퀴풀에게 노래함 / 류시화 그것이 내 안에 있다 어지러운 풀냄새가 나는 것으로 그것을 알았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이미 내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나는 그것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일종의 모래장미라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그 무엇 나는 들판으로 걸어갔다 내 현기증이 다만 풀냄새 때문이라고 곧 사라질 것이라고 열에 들떠 내가 손을 뻗자 강 하나가 둥글게 뒤채이기 시작했다 나는 걸어간다 걸어가면서 내 안에 더 강렬한 무엇을 느낀다 그것이 나에게 명령한다 나무 아래 양팔을 벌리고 서서 태양을 부르라고 그래서 나무를 불태우라고 들판 가장자리에 더 많은 불꽃이 일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구두는 돌들과 부딪혀 맹수처럼 튀어오른다 어떤 뜻을 가지고 신이 나를 만.. 더보기 버려지는 신발들은 슬프다 / 김유석 버려지는 신발들은 슬프다 / 김유석 사람들은 왜 신발을 벗어 두고 가는 걸까 그게 슬펐다, 그 어떤 유서보다 물가에 가지런히 놓인 구두 한 켤레 어느 헐거운 길이 거기까지 따라와서 맨발이 되었을까 문단속을 하는 대신 토방에 신발을 반듯이 올려놓고 집 비우던 아버지 삼우제 날 문밖에 내어 태우던 부르튼 발바닥들이 슬펐다 그래서일까 유령들은 대부분 발을 감춘다 신발을 신고 있다는 건 어디쯤의 고단한 이정(里程) 새 신발을 산다는 건 닳게 해야 할 바닥이 남았다는 것 신발을 잃어버리고 울먹이던 유년의 맨발에 유행 지난 멀쩡한 구두 한 벌 버리기 전 헐겹게 신겨보며 몇 켤레쯤 여벌을 가진 생을 떠올려 본다 . 2008년 봄호. 전북 김제 출생,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더보기 인력시장 / 문성해 인력시장 / 문성해 인력시장 가로수들 사이 간간이 섞인 목련 나무에는 목장갑을 낀 꽃들이 꽂혀 있다 허공에서 일자리 하나 얻기 위해 울룩불룩 울분으로 피어난 저 꽃들 사내들 주머니 깊숙한 곳에도 며칠째 똘똘 말린 채 때 전 꽃송이 한켤레 숨겨져 있다 이른 아침부터 뭉텅이로 피어난 저 꽃들을 씽씽 그냥 지나치는 바람 쓸데없이 꽃잎의 근육만 더욱 부풀리는 봄볕은 아군인가 적군인가 아침이 다 가도록 불러주는 이 하나 없고 땅바닥만 긁다 일어서는 사내들 하늘 한귀퉁이만 긁다 떨어지는 꽃들 떨어진 꽃잎 속에는 아직도 움켜쥔 허공의 냄새가 난다 경북 문경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 신춘문예 시 당선 2003년 신춘문예 당선 시집 『자라 』『 아주친근한 소용돌이』『입술을 건너간 이름』 『밥.. 더보기 수의 / 이명윤 수의 / 이명윤 이렇게 함께 누워 있으니 비로소 운명이란 말이 완전해집니다 당신을 향한 모든 절망의 말들이 내게로 와 흰 눈처럼 쌓이는군요 나는 철없는 신부처럼 아름다운 죽음을 얻어 살아있습니다 가장 적극적인 자세의 천장이 지켜보는 봄날의 오후, 문밖에는 꽃과 새들과 바람이 서성이다 돌아가겠지요 전신 거울을 볼 수 있을까요 공원 호숫길도 궁금한 날 멀뚱멀뚱 나는 두 눈을 뜨고 거룩한 당신이었다가 우스꽝스러운 나입니다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나는 나로부터 멀리멀리 걸어가야 합니다 자꾸만 삶을 향해 흔들리는 나를 잊으려 당신을 따뜻하게 안습니다 그러니까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죽음이 슬픔을 우아하게 맞이하도록, 태도는 끝까지 엄숙하게, ―계간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2007년 《시안》으로 등.. 더보기 이전 1 ··· 5 6 7 8 9 10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