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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詩

수몰 지구 / 전윤호 수몰 지구 / 전윤호 ​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 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 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는 내리고 흘러 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전윤호 시집『세상의 모든 연애』(파란, 2019) 1964년 강원도 정선 출생 동국대학교 사학과 졸업 1991년《현대문학》등단 시집으로『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순수의 시대』.. 더보기
그녀의 우편번호 /김종해 그녀의 우편번호 /김종해 오늘 아침 내가 띄운 봉함엽서에는 손으로 박아 쓴 당신의 주소 당신의 하늘 끝자락에 우편번호가 적혀있다 길 없어도 그리움 찾아가는 내 사랑의 우편번호 소인이 마르지 않은 하늘 끝자락을 물고 새가 날고 있다 새야, 지워진 길 위에 길을 내며 가는 새야 긴 밤에 혀끝에 굴리던 간절한 말 그립다 보고 싶다 뒤적이던 한마디 말 오늘 아침, 내가 띄운 겉봉의 주소 바람 불고 눈 내리는 그 하늘가에 당신의 우편번호가 적혀있다. 오늘도 편지를 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 수신의 이름을 또렷이 쓴다 어머니 새야 하늘의 이편과 저편을 잇는 새야 사람과 사람 사이 그 막힌 하늘 길 위에 오작교를 놓는 새야 오늘 밤 나는 그녀의 답신을 받았다 흰 치마 흰 고무신을 신으시고 보름달로 찾아.. 더보기
슬픔이라는 구석 / 이병률 슬픔이라는 구석 / 이병률 쓰나미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빈 공중전화부스 한 대를 설치해 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통하지도 않는 전하기를 들고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게 자기 슬픔을 말한다는데 남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하한 한 소녀는 줄곧 직진해서 걸었는데 촘촘하게 지뢰가 묻힌 밭을 걸어오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지뢰도 밟지 않았다는 것인지 가슴께가 다 뻐근해지는 이 일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나 색맹으로 스무 해를 살아온 청년에게 보정 안경을 씌워주자 몇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안경 안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벅차서라니 이 간절한 슬픔은 뭐라 할 수 있겠나 스무 줄의 문장으로는 영 모자랐던 몇 번의 내 전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 더보기
남겨두고 싶은 순간 / 박성우 남겨두고 싶은 순간 / 박성우 시외버스 시간표가 붙어있는 낡은 슈퍼마켓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오래된 살구나무를 두고 있는 작고 예쁜 우체국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유난 떨며 내세울 만한 게 아니어서 유별나게 더 좋은 소소한 풍경, 슈퍼마켓과 우체국을 끼고 있는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아 저기 초승달 옆에 개밥바라기! 집에 거의 다 닿았을 때쯤에야 초저녁 버스정류장에 쇼핑백을 두고 왔다는 걸 알았다 돌아가 볼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나, 나는 곧 체념했다 우연히 통화가 된 형에게 혹시 모르니, 그 정류장에 좀 들러 달라 부탁한 건, 다음날 오후였다 놀랍게도 형은 쇼핑백을 들고 왔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있었다는 쇼핑백, 쇼핑백에 들어있던 물건도 그대로였다 오래 남겨두고 싶은 순간이었다 -계간.. 더보기
오월 / 조현석 오월 / 조현석 오월은 두 눈 부릅뜨고 살아 있기 좋은 계절 알알이 매실 달리고 사과꽃 피어나는 하늘 위로 신맛 단맛 서서히 물들어 갈 즈음 뿌리는 뿌리들끼리, 작은 잎은 작은 잎들끼리 쓴맛도 몰래 넘겨주곤 새침 떤다 햇살 강렬해지는 한낮은 잠시 죽기 좋은 시간 무덤 위에 입힌 떼도 튼실하게 잘 자라 장마철에도 떠내려갈 고민도 없어지고 장미마저 검붉게 농익어 떨어지고 비어가는 하늘에 능소화 등불 슬몃 내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틀린 적 없이 맞다 짧은 아쉬움 감추지 못해 붉어진 애비의 얼굴 꽃 피고 지는 사이사이로 벌나비 훨훨 날고 얇은 날개에 혼 실어 천국은 아닐지라도 가고픈 불꽃 지옥이라도 데려다줄는지 몰라 —《시로 여는 세상》 2016년 가을호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에드바르트.. 더보기
발화 / 신동혁 발화 / 신동혁 식탁보에 꽃이 수놓아져 있다 바람이 불면 나는 가시넝쿨을 뒤집어쓴다 창밖이 보이지 않아 벽을 기어오를 때 빈 접시들을 떨어뜨리고 나의 두 팔을 길게 떨어뜨릴 때 식탁보는 돌아오는 것이다 이미 불타버린 채 내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다 지내는 동안 어디선가 무섭게 꽃이 번지고 있어서 불이 눈을 뜨고 있어요 불과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잠시 얼굴을 묻어보았을 뿐인데 아침은 없고 아침을 닮은 고요만 남아 있듯 식탁보에는 꽃이 수놓아져 있다 덮지도 펼치지도 못한 채 바람이 분다 ―월간《시인동네》2018.1월호 1990년 경북 구미 출생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재학중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바야흐로 발화의 계절이다. 메마른 겨울동안 산자락에 발화된 불꽃이 온 산을 태우고 잿더.. 더보기
침몰하는 저녁 / 이혜미 침몰하는 저녁 / 이혜미 ​ 내가 밑줄 친 황혼 사이로 네가 오는구나 귀밑머리 백발이 성성한 네가 오는구나 그 긴 머리채를 은가루 바람처럼 휘날리며 오는구나 네 팔에 안긴 너는 갓 태어난 핏덩이, 붉게 물든, 모든 저물어가는 것들의 누이가 되어 오는구나 네가 너에게 젖을 물리고 세계의 발등이 어둠으로 젖어든다 너의 모유는 계집아이의 초경혈마냥 붉고 비리고 아픈 맛, 나는 황홀하게 너의 젖꼭지를 덧그리고 있었다 내가 붉게 표시해둔 일몰이 세상으로 무너져내리던 날 배냇시절의 너를 안고 네가 나에게 오는구나 네가 발 디디던 곳마다 이름을 버린 잡풀 잡꽃 들이 집요하게도 피어나던 거라 옅은 바람에도 불쑥 소름이 돋아 위태로운 것들의 실뿌리를 가만 더듬어보면 문득, 그 뿌리들 내 속으로 흘러들어와 붉게 흐르고 나.. 더보기
섬진강 / 최정신 섬진강 / 최정신 삼월, 게으른 눈발이 뒷걸음질 멈짓 진주 지나 하동포구 평사리 사십리 한 물목 첫 연은 매화라 쓰고 둘 연은 산수라 쓰고 삼 연은 대숲이라 쓰는데 여백을 동백이 채운다 윤슬이 받아 적는 꽃타래 헝클어진 시를 언제 다 읽고 가라고 봄빛 하양 긴 날을 그리 읊는가 자꾸만 쓰지 마라 그토록 시울 깊은 절경의 시를, 천근 카르마는 어디쯤 부려야 하나 천릿길 더듬어 물 주렴 사연 따위 너에겐 소용치 않은 줄 알았더니 그짝 설움이 더 깊다니 수양버들 잇바디가 물색을 닮았음은 저도 강 따라 흐르고 싶나니 어쩌랴 흐르기는 너나 나나 한결, 화개장터 목로에 벚굴 한 점, 막걸리 한 모금, 너는 젖고 나는 취한다 구례, 소(沼) 깊은 계곡 거슬러 화엄에 들면 백매도 흑매도 한 오백 년 늙는다니 기리운 마.. 더보기